아무런 개연성도, 타당성도, 인륜과 도덕, 상식이란 기본적인 기준도 찾아보기 힘든, 그래서 이른바 더 이상 망가질 수 없는 막장 드라마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어이없고 비상식적인 일들이 태연하게 벌어지고, 서로간의 관계는 꼬일 데로 꼬여 있고, 사람의 감정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괴상한 사람들이 넘쳐나기에 가만히 보고 있자면 머리가 다 아프기도 하고 짜증과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건 예사지요. 만든 사람들의 머리 속이 궁금해지는 그런 드라마. 하도 많이,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기에 막장 드라마는 이젠 하나의 특정 장르처럼 느껴질 정도에요.

이런 일련의 작품들의 온상지는 단연 일일 드라마나 아침드라마입니다. 습관적으로 틀어놓고 욕하면서 보게 되는, 아무래도 30~40대 이상의 주부들이 시청자의 핵심을 이루고 있죠. 그렇기에 그 주인공들은 고생하는 며느리, 혹은 부당하게 대접받는 능력 있는 여성이 되기 일쑤입니다. 일상에서 겪게 되는 스트레스와 한, 고달픔을 극대화시키고 이를 극복해내는 과정을 통해서 주인공의 삶에 감정이입하며 응원하기도 하고 원망도 하면서 후련함과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막장드라마야말로 하루에 30분씩 제공되는 많은 이들의 즐거운 취미생활이라 해야 할거에요.

그런데 이런 무언의 공식에 반하는 한 배우가 있습니다. 일일 드라마의 꽃인 9시 뉴스시간 바로 전 타임을 장식하는 주인공이고, 그 역시도 다른 막장드라마에서처럼 별의별 사연과 고생을 가지며 기기묘묘하게 꼬여버린 가족사와 사람들 관계 속에서 애증과 갈등, 복수를 반복하지만 성별은 특이하게도 남성이거든요. 이젠 이리저리로 내용을 꼬아버려서 풀기도 난감해 보이는 MBC의 대표 막장드라마 황금물고기의 주인공 이태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런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막장의 왕자님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 일일 드라마에서 남자들이 하는 역할이란 몹시도 기계적이고 뻔한 것들을 답습하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가족, 특히나 어머니의 추상같은 존재감에 찍소리도 못하거나 다른 여자와 정분이 나서 자기의 아내나 연인을 상처 입히는 못난이 아들내미, 그렇게 내뱉어져서 힘들어하며 자신만의 삶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여자 주인공을 구원해주는 왕자님(대부분의 경우엔 잘생기고 착한 실장님, 원장님들이죠)의 두 유형으로 나뉘죠. 시아버지나 친정아버지, 혹은 동생 등등을 제외한다면 막장드라마 속 남자들은 모두 이름과 직업만 바뀔 뿐 대부분 마치 작가 협회에서 규칙으로 정해놓은 것처럼 그렇고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황금물고기의 주인공, 이태영을 연기하는 이태곤은 조금, 아니 많이 다릅니다. 물론 배수빈이 분한 천사의 유혹처럼, 이젠 막장드라마의 하나의 모범답안이 되어버린 아내의 유혹을 그대로 주인공만 남자로 바꾸고 변주한 티가 역력하기는 하지만 그가 펼치는 복수극은 그다지 통쾌하지도 속이 시원하지도 않거든요. 오히려 상황은 확실히 피해자로서 복수를 꾀하는 것이기는 한데 이 남자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똑같은 나쁜 놈으로 매도하며 욕을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불쌍하긴 하지만 무작정 편들어주기엔 찜찜한, 그렇다고 쉽게 내치기엔 매력적인 주인공. 이렇게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주인공은 오랜만이에요.

이것은 등장인물 모두의 역할이 뭐가 뭔지 모르게 섞어버린 작가의 괴이한 취향, 혹은 능력 탓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이태곤이란 배우 본연의 매력과 연기력에 의한 성과물입니다. 남자다운 마스크, 탄탄한 기본기, 그리고 아무리 억지스럽고 납득이 안가는 상황이 이어지지만 그것을 납득시킬 수 있는 연기력의 힘이죠. 막장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용은 말이 안 되지만,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그게 또 그럴듯하거든요. 막장 드라마 속 사람들을 연기하는 것이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불운한 복수자 이태영의 생명력은 연기자 이태곤의 개인적인 매력과 연기력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어요.

이제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황금물고기에서 얻은 유일한 소득도 바로 이것입니다. 배우 이태곤의 다음이 궁금해졌다는 것이죠. 오랜 배우 경력에서 이제야 대표작을 얻게 된 조윤희나 기나긴 침묵을 깨고 연기자 경력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한 소유진의 활약도 인상적이지만, 이 드라마의 최고 수혜자이자 공로자는 단연 이태곤이에요. 그가 다름 작품에서 어떤 모습을 선택하게 될지, 캐릭터와 내용이 가진 중독성 때문에 다음 작품에서도 쉽게 전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러고 보면 막장드라마의 또 다른 이름은 배우를 양성하는 연기학원 같아요. 우수한 성적으로 연기학원을 졸업한 막장드라마의 왕자님. 이렇게 그 행보를 주목할 만한 멋진 배우가 많아지는 것은 시청자 입장에선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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