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이하 곰돌이 푸)>의 영화 후기, '가족이 함께 봤다. 같은 영화를 봤는데, 재미있었다는 공통평 더하기 각자의 감동 포인트와 받아들이는 깊이가 따로 있었다' 란 장고님의 후기가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한 가장 적확한 후기일 것이다. 아이들이 함께한 영화관이 늘 그렇듯 시끌벅적하고, 영화 상영 도중 화장실 다녀오는 아이부터 아이들의 재잘거림까지 어수선한 분위기와 함께였다.

곰돌이 푸를 만나서 반가워 까르르 웃어대는 아이들과 함께, 한때 곰돌이 푸를 봤던 이젠 다 자란 아들과, 그 곰돌이 푸를 보던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보다 더 그 세계에 빠져들었던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온 지금의 부모들과 함께 '추억'을, '감동'을 공유했다.

추억의 곰돌이 푸, 힐링의 전도사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스틸 이미지

<짱구>는 야하다고 못 보게 하던 엄마가 그래도 그나마 우량 만화라 보게 하던 게 곰돌이 푸였다고 한다. 그랬던 시절의 곰돌이 푸는 이제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라는 베스트셀러로 새삼 인기를 끌고 있다. 영화 속에서도 그렇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느림보 곰돌이가 바쁘게 사느라 자신을 자꾸 놓치고 사는 것 같은 젊은이들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힐링 전도사'가 되어 복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어린 시절 힐끔거리며, 아이들과 함께 곰돌이 푸를 시청하던 부모 세대에게 '곰돌이 푸'는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곰돌이 푸보다는 어른이 되어버린 로빈, '책임감으로 사는 어른'의 이야기가 마음을 건드리지 않았을까?

추억의 만화를 실사로 구현한 디즈니의 라이브 액션 작품인 <곰돌이 푸>는 이전의 <미녀와 야수>보다는 외려 영국, 프랑스 합작 작품인 <패딩턴> 시리즈와 더 동질성을 느끼게 한다. 도시로 온 곰돌이 인형 패딩턴이 도시적 삶에 길들여진, 그래서 가족 간의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한 가정에 들어와 본의 아니게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도록 하여 결국은 가정을 다시 '평화롭게' 만들어 준다는 해프닝의 구조에 있어 동일하다. 또한 이는 지금의 거대 스튜디오 디즈니 이전 초창기 디즈니 이래 줄곧 구현하고자 해온 '스위트 홈'의 신화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매우 '디즈니'적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어버린 소년, 로빈의 책임감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스틸 이미지

그 '스위트 홈'의 신화를 재현하기 위해 <곰돌이 푸>는 이젠 어른이 되어버린 로빈을 내세운다. 헌드레드 에이커 숲에서 봉제인형 곰돌이 푸와 피그렛, 티거, 이요리, 올빼미, 토끼 등과 함께 소꿉놀이를 하던 로빈. 하지만 소년의 '동화'는 성장과 함께 멈춰버린다.

성장의 계기가 된 건 우선 그를 시류에 따라 기숙학교로 보내버린 부모들이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히 곰돌이 푸를 끄적거리던 소년에게 '동화'의 세계는 유효했다. 그런 그에게 닥친 가장인 아버지의 죽음. 친척 할머니의 '이젠 네가 이 집안의 가장이야'라는 말 한 마디는 급격히 소년을 '철'들게 만들어 버린다. 어쭙잖게 어른의 세계를 엿본 우리의 청소년들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자신들을 내모는 것처럼.

에블린을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잠시 전쟁터에 참전하고, 다시 돌아와 그 시대의 여느 남자처럼 가방 회사 윈슬로를 다니게 된다. 영화 <모던 타임즈>의 또 다른 버전처럼 돌아가는 직장. 그러나 일벌처럼 열심히 일하지만 직장 내 책임자의 자리를 맡은 로빈에게는 자신의 수하에 있는 직원들의 자리를 건 '경비 절감'을 앞세운 경영합리화의 위기가 닥친다. 동료들의 밥줄을 쥔 그가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고심하는 시간은 곧 그의 가족에게는 '소외'의 시간이 된다.

그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돈을 잘 벌어 좋은 기숙학교에 아이를 보내면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아빠 때문에 아내도, 아이도 지쳐가게 된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친구들을 잃어버렸다고 찾아온 어린 시절의 친구 곰돌이 푸도 나타나는데.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어른 로빈을 다시 동화의 세계로 내모는 게 또 다른 '책임'이다. 곰돌이 푸는 로빈을 채근한다. 네가, 헌드레드 에이커 숲에서 우리와 함께하던 시절의 로빈이 언제나 우리들의 해결사였다고. 이젠 그런 건 없다고 외치던 로빈이 그 시절 괴물 헤팔럼을 무서워하던 친구들을 위해 갖가지 묘수를 짜내던 그 시절부터 로빈은 든든한 친구였다고. 그러고 보면 늘 로빈은 당연히 '해결사'였다. 너무도 봉제인형 친구들의 호들갑을 처리해 주는 게 당연했는데, 봉제인형 친구들을 위해 헤팔럼 용 함정이나 파주던 '책임'은 이제 어른이 된 소년에게는 헤팔럼이 아닌 동료들의 목을 쳐야 할 위기로 변해버린 것이다.

책임감의 변화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스틸 이미지

영화 속 로빈은 일관되게 '책임'감이 있다. 어린 시절 로빈은 봉제인형 친구들에게, 그리고 어른이 된 로빈은 가족과 회사에, 물론 그 방식의 문제다. 어린시절 함정 정도 파주던 그 식으로 맞서기엔 세상이 너무 강퍅해진 것이다. 또한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물려준 자식을 책임지는 방식은 아빠의 사랑을 바라는 딸에겐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물론 영화 속 우리의 로빈은 더 늦기 전에 다시 곰돌이 푸를 만나, 곰돌이 푸와 함께 놀던 그 시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하던' 시절의 교훈으로 현명하게 늦지 않게 행복을 찾는다.

로빈의 방식은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 ‘방식’을 변화시킨 것이다. 회사 일에 충실한 것이 곧 가정을 지키는 것이라 여겼던 지난 시대의 사고방식을 어린 시절의 친구들과의 회동을 통해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 대한 책임으로 전환한다. 또한 고용주에 대한 책임을 ‘동료’에 대한 책임으로 회사에 대한 소속감의 질적 전환을 이룬다.

영화 속 로빈의 변화는 역사적 배경을 더하며 풍성해진다. 전후 급격한 산업의 발전과,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산업의 위기와 변화를 로빈이 다니는 '윈슬로'라는 가방회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19세기 중엽 처음 등장했던 귀족들 전용의 여행용 가방을, 여행의 대중화에 걸맞게 '루이비통'이 대중화시킨 그 콘텐츠의 혁신을 영화 속 윈슬로에 도입한 로빈의 묘수로 절묘하게 흡인해 낸다.

거의 옷장 수준의 가방이었던 귀족들의 여행 가방이 루이비통에 의해 기차 화물칸에 적재되기 쉬운 대중의 가방으로 탄생된 그 순간을, 윈슬로의 경영합리화를 돌파할 묘수로 배치시킨 것이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펼쳐진 해변 휴가를 받아 윈슬로의 가방을 들고 해변으로 놀러온 직원들,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행복'하다는 곰돌이 푸의 인생철학이 시대의 트렌드로 변화되는 순간을 영화는 절묘하게 포착해 낸다.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스틸 이미지

즉, 이전 세대 아버지들이 그저 나가서 돈을 잘 벌어 오는 것이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을 다한 것이었다면, 윈슬로의 가방을 들고 여행을 다니게 되는 시대에 아버지의 책임감은 영화 속 로빈의 딸이 바라던 아버지의 상처럼, ‘가족과 함께’ 일상의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책임이다. 물론 윈슬로의 적자 경영을 타파한 신의 한 수라는 경영적 능력은 놓치지 말아야 할 아빠의 능력이다.

그렇게 영화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행복'을 논하면서 결국은 변화하는 시대, 변화하는 아버지의 자리, 아버지의 책임을 말한다. 다행히도 일찍이 친구들과 놀던 그 어린 시절부터 책임감 있던 소년은 늦지 않게 다시 찾아온 친구들 덕에 강박처럼 자신을 휘몰아쳤던 그의 아버지 세대가 짓누르던 맹목적 책임으로부터 한결 짐을 덜었다.

어른에게는 어른의 자리가 있다. 하지만 그 자리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아버지의 시대 기숙학교에 보내는 것이 책임을 다한 것이었다면, 이제 로빈이 그의 딸과 옛 친구인 곰돌이 친구들과 살아가야 할 시대의 책임은 '함께 행복하기'이다. 그리고 그건 2018년 이 시대에 우리 어른들이 <곰돌이 푸>를 보고 감동받듯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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