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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 프라임’ 한글은 언제부터 조선 백성들의 언어가 되었을까?[미디어비평] 톺아보기
meditator | 승인 2018.10.10 18:00

한글은 언제부터 나라말이 되었을까? 조선의 국문은 '한문'이라는데 과연 그럴까? 양반들은 백성들과 소통할 때 어떤 글을 썼을까? 사대부 남편은 아내와 자식에게 어떤 글로 편지를 썼을까? 한글, 언문은 정말 아녀자들만의 언어였을까? 그 의문으로부터 EBS 다큐 프라임 한글날 특집은 시작된다.

'임금이 이르되 너희가 처음에 왜에게 후리어(잡히어서) 인하여 다니는 것은 너희의 본마음이 아니라, 나오다 왜에게 들키어 죽을까도 여기며 도리어 의심하되 왜에게 편들었던 것이니, 나라에서 죽일까 두려워 나오지 아니하니, 이제 그런 의심을 먹지 말고 서로 권하여 다 나오면 너희를 각별히 죄주지 아니할 뿐아니라 .......'
​​​​​​​                                              -선조 국문 유서 (번역)

선조가 언문으로 백성에게 내린 글

선조국문유서(보물 제951호) ⓒ한국학중앙연구원

1492년 부산포로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을 점령해 갔다. 5월에는 한양이 함락되었고 6월에는 평양이 넘어갔다. 7월에는 함경도에서 두 왕자가 잡혔다. 일본군은 관아를 장악하고 마치 고을 수령인 양 백성들에게 쌀을 풀어 회유하며 다스리려 했다. 일본군의 서슬 퍼런 조총 등의 무력에, 그리고 그들이 나누어주는 쌀에 점점 다수의 백성들이 투항했다. 더구나 나라님도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버린 나라에서 백성들이 택한 자구책이었다. 의주의 선조는 다급해졌다. 전장에서 도망친 군주의 면을 세우기 위해 조정은 고심했다. 그 고심의 결과물로 나온 것이 바로 위의 '선조 국문 유서'이다.

한글날 특집으로 방영된 EBS 다큐 프라임은 이 '선조 국문 유서'에 주목한다. 72주년 한글날 다큐는 그 특집으로 '암글', 언서', '언문', '속문'이라 낮잡아 취급되었다 여겨졌던 '한글'의 존재를 다시 살핀다. 선조가 국문으로 유서를 내린 1593년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150여 년이 흐른 뒤였다. 아녀자들이나 배우는 언문으로 취급받은 줄 알았는데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다다르는 위급한 상황에 나라님이 한글로 백성들에게 '유서'를 남겼다. 이는 이미 다수의 백성들에게 '한글'이 '소통'의 도구가 되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고 다큐는 전문가의 증언을 통해 말한다.

15세기 한글이 창제된 이후 중앙 정부는 <월인석보> 등의 불경 출판물을 통해 한글을 보급하였다. 그런 노력과 함께 후에 발견된 단 한 장으로 이루어진 한문 독본 '언문 반절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은 금세 실용적인 언어로 조선에 퍼져나간다. 그래서 16세기, 사찰은 물론, 각 지방 관아 등에서 실용 언어로 한글이 대중화되기에 이르렀다.

그 실례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선조의 국문 유서이다. 또 다른 예로 1592년 진주 대첩 과정에서 초유사로 김시민을 목사로 세우고 병력 모집 등에 힘쓴 학봉 김성일이 아내에게 보낸 서신이 있다. 경남 산청에서 본가가 있는 안동에 보낸 이 편지에는 다가오는 설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잘 드러나 있다. 자신이 없어도 잘 지낼 것을 당부하며 훗날을 기약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토로한다. 김성일은 이 편지를 끝으로 결국 타지에서 생을 다한다. 결국 이 한 장의 언문 편지가 그의 유서가 된 것이다.

백성 간의 소통의 문자, 언문

신부 문안편지 ⓒ한국학중앙연구원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은 계층을 뛰어넘는 소통의 문자였다. 학봉 김성일의 경우처럼 남편이 아내에게, 자식에게, 주인이 노비에게, 혹은 관가 아전들의 기록과 소통에 두루두루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언문의 대중화'는 언제부터 이루어졌을까? 다큐는 그 예를 '언문 편지'를 통해 살펴본다. 대부분 죽은 이와 함께 매장되었다가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언문 편지는 편지글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당시의 일상어에 대한 가장 살아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당시 언문의 대중화 정도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사료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한글 편지는 1490년대로 추정되는 신창 맹씨의 남편 군관 나신걸이 그의 아내에게 보낸 언문 편지이다. 대전 회덕이 집이었던 군관 나신걸, 하지만 그는 본가에 들리지도 못한 채 함경도로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의 조선 상황에서 한번 부임을 하면 해를 넘겨야 돌아올 수 있는 처지, 아내와 갓난아이 한번 보지 못한 안타까움을 절절하게 편지로 남겼다.

1490년이라면 한글이 창제된 지 불과 5~60년 후다. 그런데 벌써 그 당시에 군관이 자신의 아내에게 언문 편지를 썼다는 건 당시 지방의 여성들조차 한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한글이 빠르게 보편화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조선시대 대중적 언어, 한글

언문 반절표 ⓒ국립한글박물관

역시나 이장 작업을 하다 발견된 17세기의 곽주의 편지에는 '자식들이 여럿 갔으니... 수고스러우시겠으나 언문을 가르쳐 보내시옵소서'라며 장모에게 당부한다. 자식들에게는 '언문'을 배워 아비에게 편지를 쓰라 재촉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사대부들 사이에 '언문'은 필수요, 그에 대한 교육열조차 엿볼 수 있다는 것을 다큐는 밝히고 있다.

초성, 종성에 쓰인 자음과 중성에 쓰인 모음을 결합한 글자들을 배열해 놓은 '언문 반절표'는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서당이나 사가에서 언문을 배울 때 널리 쓰였던 한글 교재다. 이를 장터에서 인쇄하여 팔 정도로 당시 '언문'은 대중적인 언어였다.

언문의 위력은 어떠했을까? 앞서 선조 국문 유서가 오늘날 사료로 남겨지게 된 건 권탁의 공이 크다. 선조의 유서를 받아 본 권탁은 당시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상태임에도 칼을 들고 김해로 갔다. 당시 김해는 왜군들이 득실거리는 지역으로 기피 지역이 되어 지방관이 공석이다시피 한 곳이었다. 그곳에 가서 권탁은 스스로 김해 수성장이 되었다. 그리고 왜군 진영에서 부역을 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임금의 유서를 보여주고 회유, 탈출 작전을 펼친다. 권탁의 의기로 100명의 백성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권탁은 죽고 만다. 이처럼 나라님이 쓴 언문 교서는 초야의 선비를 움직였고 백성들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일부 사대부들만의 전유물이었던 한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당시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소통 수단이 된 언문, 한글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문'이 나라의 글이 되기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894년 고종은 갑오개혁의 공문식 1호로 국문을 사용할 것을 명했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450년 만에 나라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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