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해설위원 이영표 씨가 에세이집 <말하지 않아야 할 때>에서 아내의 셋째 출산 때 ‘무통 주사’를 성경에 따라 거부했다고 밝혀 논란이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원죄 때문에 신에게 벌을 받는 대목이 나온다. 아담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골라내 땀 흘려 경작해야 먹고 살 수 있는 ‘노동’의 저주를, 이브는 ‘산통’의 저주를 받는다. 이영표 씨는 이를 따르기 위해 아내에게 “주님께서 주신 해산의 고통이라면 피하지 말자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영표 씨는 논란이 일자 아내의 선택이었다고 해명했고, 일부 여론은 ‘개인사’나 ‘신념’이라며 옹호했다. 하지만 애초에 ‘무통주사’는 이영표 씨가 공인으로서 공적 매체인 출판물을 통해 언급한 것이었고, 해명에서도 “저에게는 이런 마음을 가진 아내 자체가 축복”이라며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무엇보다 여타 의학적 조처와 달리 출산과 양육에 있어 최대한 무통주사나 제왕절개 없이 자연 분만을, 분유보다 모유 수유가 ‘어머니다움’에 가깝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는 점에서 제대로 짚어야 할 문제다.

이영표 KBS 축구해설위원 ⓒ연합뉴스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는 관용구나 ‘낳으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이라는 <어머님 은혜> 가사처럼 그동안 산통은 ‘어머니됨’의 시작일 뿐 아니라 ‘모성’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이런 문화에서 산통은 무통주사가 고안된 이후에도 선택이라기보다 임부에게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산통뿐 아니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 발이 다 닳도록 고생 하시네’로 대표되는 임신, 양육, 가사노동 등 모성에 부여된 각종 노고도 마찬가지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는 축복 아래, 여성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내면화했다.

이렇게 여성에게 부과된 모성은 가부장이 여성을 손쉽게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창세기에서도 이브에 대한 산통을 언급하면서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며 남편에 대한 종속을 말한다. 반면 남성은 땀 흘려 경작하지만, 문명을 일구는 주체가 되어 여성을 다스린다. 남성과 여성, 정신과 몸, 문화와 자연, 이성과 감성이라는 전형적인 이분법이다. 이는 모성에 자연과 같은 ‘신비함’, ‘숭고함’ 이미지를 덧씌워 여성이 의료 혜택을 포함한 교육, 정치 등 각종 문명과 먼 존재라는 편견으로 작용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여성들에게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한 노고와 고통에 대한 정보는 빈약하게 주어졌다. 그저 임신하면 ‘저절로 모성이 샘솟아’ 모든 과정을 자연스럽게 감내할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신체와 삶을 좌지우지하는 정보가 부족한 것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몸과 삶을 계획하고 선택하는 ‘자기 결정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은 탓이다. 이것이 가부장에 대한 의존과 종속을 공고화했던 것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산통(출산)을 포함한 여성의 재생산권과 섹슈얼리티는 주체적 선택보다 그대로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여성의 미덕으로 여겨졌다. 여성의 성매매, 낙태, 비혼·비출산, 피임, 흡연에 대해 ‘쉽게 돈 벌려 한다’, ‘책임 안 지려 한다’, ‘쉽게 살려고 한다’라며 이기심이나 방탕으로 연결 짓는 것이 대표적이다. 여성이 아름다움을 위해 허기와 코르셋을, 낙인을 피하기 위해 ‘정절’을 감수해 온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성의 해방은 기술의 발전으로 재생산과 정절의 의무에서 벗어난 만큼 이뤄져 왔다. 대표적인 것이 피임 기술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기대수명이 늘어나게 된 것도 1900년대 들어서의 일인데, 출산율이 급감하는 시기와 겹쳐져 임신·출산·육아가 여성의 수명을 결정짓는 으뜸 요인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여성 참정권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여성의 재생산과 관련된 고통은 모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모성을 잃게 한다. 여성의 재생산 욕구와 의지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당장 출산율이 매년 역대 최저를 갱신하는 것도 출산, 육아 시 감수해야 할 노고와 고통 때문이 아닌가. 아예 모성 자체를 없애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출산으로 사망하는 산모만 출생아 10만 명당 11명(OECD 평균 6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사망하지 않더라도 모체 건강을 악화시켜 육아 능력에 악영향을 주기도 한다.

모성을 생물학적인 본능으로, 그래서 고통을 감수하면 얻는 신비화된 무엇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작가 나혜석은 이미 70여 년 전에 <모(母)된 감상기>에서 모성이 절대적일 수 없는 이유로 “어찌하여 한 부모의 자식에게 대하여 출생 시부터 사랑의 차별이 생기고 조건이 생기고 요구가 생길까. 아들이니 귀엽고 딸이니 천하며, 여자보다 남자를, 약자보다 강자를, 패자보다 우자를, 이런 절대적 타산이 생기는 것이 웬일인가”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모성이 아이를 가지면서 생긴 것이 아니라, 기르는 시간을 거치며 생겼다고 고백한다. 결국 출산과 양육은 모성에 떠맡길 게 아니라 혈육을 떠나 남녀 모두 약자(아이)를 잘 키우고자 하는 윤리적 의지, 그리고 그 의지를 뒷받침할 사회적 제도로 보장되어야 한다.

더 이상 ‘무통주사 거부’와 같이 여성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감수하게 해선 안 된다. 기독교는 이러한 여성 이미지를 고착화했던 것을 반성해야 한다. 대신 사회는 여성이 자신의 재생산권과 섹슈얼리티를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도움이 될 문화와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영표 씨의 무통주사 거부 논란에 대한 여성들의 심정을 잘 대변한 작품을 소개한다. 작가 나혜석이 산통을 이야기한 시 <산욕(産褥)>의 일부다.

여보 그대 나 살려주오/ 내 심히 애걸하니/ 옆에서 팔짱 끼고 섰던 부군(남편)/ “참으시오.” 하는 말에/ “이놈아 듣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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