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SK다. 4일 일자리위원회 회의가 SK하이닉스 청주 공장에서 열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재벌 총수와 만나는 그림이 다시 한 번 연출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결국 기업”이라고 했다. 공공부문에서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도 대선 기간에 공공부문에서의 고용 창출은 일종의 “마중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 이 말 자체가 틀린 건 아니다. 다만 기업이 좋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다.

조선일보는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5일 사설에서 “정부가 세금 주도 일자리 정책을 민간 기업 주도로 전환하려는 신호가 아니냐는 기대 섞인 해석도 나오고 있다”면서 “정책 역주행을 끝내고 일자리 창출의 기본 원칙으로 돌아간다면 진심으로 환영할 일”이라고 썼다. 앞서 본 것처럼 좋은 일자리를 기업이 만든다는 건 그저 당연한 말에 불과한데 새삼 환영할 일이 무엇인가?

이러한 보수언론의 긍정적 반응은 대기업이 원하는 바를 정권이 들어줄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문재인 대통령은 최태원 SK회장이 개인정보 관련 규제에 불만을 표하자 “필요한 게 있으면 알려 달라”면서 “협력업체와 잘 상생하는 것도 중요하고 지역에도 많은 기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 시책(?)에 잘 따르면 원하는 바를 들어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정부가 사회적 대화 틀의 실효적 구축, 증세 계획과 복지제도 등 사회안전망 강화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갖지 못하면 결국 대기업과 관료에 의존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이 지면에서도 수차례 논했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과 최태원 SK회장의 대화도 이런 맥락의 안에 있다.

개혁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안 되는 건 일단 미뤄 놓자는 생각은 교육 정책을 다루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4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유치원 방과 후 영어교육을 허용하겠다는 것에 가까운 답변을 내놨다. 유치원 방과 후 영어교육 금지는 공교육정상화법에 따라 초등학교 1, 2학년 방과 후 영어 교육 금지와 형평을 맞춘 것이다. 따라서 유치원 방과 후 영어교육을 허용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면 초등학교 1, 2학년의 경우도 마찬가지 원리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애초 정해진 정책의 방향이 뒤집히는 수순인 셈이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방과 후 영어교육 뿐만이 아니다. 수능 절대평가의 경우 중장기적 과제로 밀려났고 고교학점제나 내신 절대평가 등의 공약 실현도 2025학년도로 미뤄졌다. 유은혜 부총리 겸 장관의 위장전입보다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묻는 게 절실한 상황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오전 충북 청주시 흥덕구 SK하이닉스에서 열린 'M15' 공장 준공식에서 최태원 SK회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대기업에 손을 벌려 일자리를 늘리고 경기 회복에 이바지하도록 하겠다는 구상은 성공할 수 있을까? 보수세력은 마치 이 정부 들어 나타난 엄청난 변화 때문에 각종 경제지표가 곤두박질 친 것처럼 표현하지만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양극화가 확대되고 생산성이 하락하는 추세 자체는 어느 정부에서건 마찬가지로 유지돼왔다. 재래시장의 상인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이르기까지, 절박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보수세력은 슘페터주의 운운하며 기업가 정신을 되살리는 게 한국 경제를 재건할 유일한 길인 것처럼 늘상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최근 논란인 외식사업가 백종원 씨의 사례만 봐도 드러난다. 막걸리 맛을 좌우하는 것은 누룩이냐 물이냐, 또는 12개 막걸리에 대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꼭 통과해야 하느냐는 것 등보다 중요한 것은 백종원 씨가 가르치는 ‘장사 수완’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이다.

문제가 된 막걸리 주점에서 업주와 백종원 씨가 나눈 대화는 분명히 기업가적이다. 업주가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내놓는 이런 저런 주장을 반박하며 백종원 씨가 내놓는 근거는 자신의 ‘경험’이다. 백종원 씨는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며 장사꾼이 자신이 아는 이론만을 따르는 것은 아집이라는 취지의 말도 했다. 이런 어법은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지적한바 그대로이다. 기업가가 자신의 성공을 ‘자수성가’의 결과로 포장하기 위해 지식이 아닌 실용적 태도나 영적자조, 심지어는 사회진화론을 동원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는 얘기다.

기업가 정신이 사회의 진보를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의 전제는 무엇일까? 기업가 정신 구현의 이상적 모델은 기업가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모험을 거듭해 새로운 상품으로 시장을 개척하며 사회를 혁신할 수 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앞서의 막걸리 소동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을 더 잘해보자는 게 아니라 기성의 해법을 답습하는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물론 이건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백종원 씨는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을 해야 한다. 국회는 골목상권을 살리기 위한 대책을 묻겠다고 한다. 일부 의원들은 백종원 씨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더본코리아가 호텔업, 술집 등으로 업종을 확장하고 방송을 통해 간접광고를 하면서 오히려 골목상권을 위협한다는 지적을 하겠다며 벼르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면 백종원 씨의 사회적 역할은 방송 출연이라는 보험(?)을 바탕으로 영세 사업주들에게 안전한 생존 해법을 가르쳐 주면서 자신의 프랜차이즈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있는 것 같다. 이게 적어도 한국에서 구현되는 기업가 정신의 최대치이다.

과연 규제완화로 신시장 개척을 가능하게 해주면 대기업이 고용도 늘리고 사회적 기업 육성에도 나서 지역 경제에 이바지하는 지속가능한 모델을 만들 수 있게 될까? 너무 예단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백종원 씨 만큼도 못할 거라는 데에 한 표를 던진다. 오로지 이득이 될 때에 이득이 되는 만큼만 하는 것이다.

과거의 사례들은 대기업이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려면 막대한 이득을 보장해주는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협박까지 동원해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노태우 정권에서의 부동산 폭등은 당시 김종인 경제수석이 재벌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 등 협박성 발언을 반복한 뒤에야 해결의 실마리가 잡혔다. 그런데 이 정부는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집권했다. 후퇴라고 말하지 않을 방법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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