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에 이은 유엔총회 일정을 거치면서 북핵 문제는 비로소 본궤도에 오르는 모양새다. 지난해와는 완전히 달라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유엔총회 기조연설은 이런 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한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다음달 4차 방북을 기정사실화 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북미정상회담이 애초 예상과 달리 중간선거 이후에 이뤄질 수 있음을 암시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더 지켜볼 일이지만 북미 사이의 쟁점 자체는 달라진 것이 없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핵시설 및 미사일 시험장 폐기와 이에 대한 검증 가능성을 열어두었지만 미국은 여전히 종전선언 등 체제보장 방안에 대한 확답을 거부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종전선언의 가치를 낮추는 ‘가격협상’에 진력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미국으로서는 손해 보는 일이 전혀 없다”면서 “군사훈련 중단은 언제든지 재개할 수 있다.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이기 때문에 언제든 취소할 수 있다. 설령 제재를 완화하는 한이 있어도 북한이 속일 경우 제재를 다시 강화하면 그만”이라고 한 게 대표적이다. 북한의 선제조치가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므로 종전선언을 쉽게 내줘서는 안 된다고 보는 주장이 미국 내 확인되는 여론의 다수인 게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이 부분을 겨냥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될 경우 북미간 협상은 굳이 비유하자면 북한의 미흡한 조치와 불완전한 종전선언을 교환하는 ‘스몰딜’ 수준에서 1차적인 타결을 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기존의 대결적 구도가 이어지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합의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여기서 우려가 되는 것은 이게 트럼프 행정부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이득만 안겨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지시간 26일 유엔 안보리회의를 주재하면서 “비핵화는 시간 문제가 아니다”라며 “북핵 협상 타결은 2년이 걸리든 3년이 걸리든, 혹은 5개월이 걸리든 문제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발언이 정확히 트럼프 대통령이 처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현재 조건에서 북핵 문제의 실질적 해결을 위해서는 ‘시간표’를 전제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시간표를 정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비핵화를 완료하는 시점을 확정해야 하는데 이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불성실한 태도 역시 문제겠지만 미국의 비핵화 완료 판단 역시도 사실상 무한히 유예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미국 내 다수를 형성하고 있는 강경파들은 북한이 핵무기 원료 등을 은닉할 가능성을 기정사실로 보고 있다. 따라서 ‘미래핵’ 제거를 위해 북한의 핵과학자들을 국외이주 시키는 방안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북한이 독재국가라도 이는 통치 논리상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미국 내 강경파들은 북한이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면서 비핵화는 여전히 달성되지 않았고 합의는 미흡하다는 주장을 끝없이 반복할 것이다.

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롯데 팰리스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사실 미국 내 반대 여론은 트럼프 대통령이 무엇을 하더라도 이를 깎아내리고 모욕할 모든 준비가 돼있다. 이들은 어떻게든 트럼프 대통령이 불충분한 합의를 했다고 주장할 텐데, 앞서의 구도는 이런 비난의 근거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선언에 대한 확정적 표현을 피하고 북미정상회담을 중간선거 이전으로 못박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북핵문제를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 북한에 과도한 양보를 했다는 비난을 자초하는 상황으로는 가지 않겠다는 거다.

물론 그렇더라도 11월 중간선거 이전에 2차 북미정상회담을 통한 합의 도출의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북미정상회담은 얻을 것이 별로 없는 이벤트일 수는 있지만 무엇이든 ‘결과’가 나오는 것만은 확실한 이벤트다. 그렇다면 이 ‘결과’에 좀 더 많은 의미부여를 함으로써 ‘부족한 성과’에 대한 비난을 중화시킬 수 있다. 이 효과가 확실한 수준에 이른다면 11월 중간선거 이전의 성과를 기대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몇 차례 이미 지적했듯 중국과 러시아를 전선의 반대편으로 끌어 들이는 것은 이 방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북한과의 협상에서 가시적 성과가 예정되어 있다는 점을 거론하며 대북 제재 유지 필요성과 이를 훼손하는 중국, 러시아에 대해 언급했다. 이 발언은 북핵 문제를 지렛대로 해서 미중 간 무역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이른바 러시아스캔들에 대한 방어적 액션을 취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북한과의 협상에서 성과를 내는 것은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대결에 대한 전초전이 되는 셈이다.

일부 언론은 이런 흐름을 ‘신냉전’으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미중 간의 무역전쟁이 군사적 부문에까지 확전되는 양상에 주목하는 관점이 그렇다. 미국은 지난 현지시간 24일 추가 조치로 대중수입액의 절반에 달하는 액수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게 됐다. 만일 타협이 이뤄지지 않으면 내년 1월부터 세율을 인상할 예정이고 중국이 보복관세를 매길 경우에는 나머지 중국산 수입품 전체에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게 트럼프 행정부의 경고이다. 이에 더해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이 러시아의 군사훈련에 합류한 이후 인민해방군 무기 구매 부서 일부를 제재 대상에 포함시켰다. 또 트럼프 행정부는 F-16을 비롯한 군용기 부품의 대만 판매를 승인해 중국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중무역전쟁을 일종의 ‘액션’으로 봤던 전문가들도 사태가 장기화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미중무역전쟁을 정치적 이벤트로 보기보다는 중국 경제의 성장과 첨단제조업으로의 산업 구조 고도화를 저지하겠다는 경제정책적 행위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도 미국의 공격이 예상보다 거세지자 내부의 혼란을 다잡으며 장기전을 대비하는 태도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 중에 일부 국가 지도자들이 소리 내어 웃은 것은 이러한 상황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제조업 첨단화 저지는 트럼프 지지층에 속하는 백인 노동자 집단에겐 절실한 문제이다. 미중무역전쟁은 최소한 그들에게 있어선 여러 비난과 몰상식을 감수하고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떤 노력으로 보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을 우스꽝스러운 ADHD환자로 묘사하고 그 지지자들을 무식한 패배자들로 묘사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이 지점을 놓칠 수 있다.

사실 북핵 문제 역시도 바로 이런 맥락 안에 놓여 있다. 어디까지나 트럼프식 프레임 안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한반도 거주민들의 열망은 러스트 벨트의 분노한 백인 노동자들의 그것과 동일한 기반 위에 존재한다. 이 안에서 우리가 결국 기대하는 것은 극우정치가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하는 광경을 보는 것이다. 사실 ‘문제’란 결국 자신이 놓인 처지나 조건과 언제나 무관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상황을 통해 우리가 재확인하는 것은 세계 체제 속에서 우리의 위치 그 자체이다. 유엔총회를 둘러싼 사건들은 바로 이 점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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