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미국 전역에서 한국인들이 꽤 자랑스러워 할 만한 내용의 다큐멘터리가 방송돼 관심을 모았다. 바로 한국 스포츠의 우수성과 각 종목을 빛낸 한국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1시간 분량으로 편집해 소개한 것이다. '한국 스포츠의 탁월함'(South Korea: Focused on Excellence)이라는 제목의 이 프로그램은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낸 손기정부터 2010년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따낸 김연아까지 한국 스포츠를 빛낸 주요 영웅들을 소개하면서 각 분야의 스포츠 천재들이 나오는 비결을 집중 조명했다. 이 프로그램 감독을 맡은 제이 잘버트 씨는 "한국과 한국 스포츠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든 없든, 어려움을 딛고 일궈낸 성공 이야기는 미국 시청자들에게도 어필할 것"이라면서 한국 스포츠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미국에서도 높은 관심을 나타내듯 한국 스포츠가 걸어온 역사는 그야말로 기적과 감동 그 자체였다.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우수한 인재들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만들어 낸 성과들은 세계인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으며 한국의 자랑 뿐 아니라 세계의 전설로 길이 남아 있다.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으며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마라토너 손기정, 불굴의 투쟁심을 앞세워 4강에 올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축구, 종주국과 비아냥대는 경쟁 국가들을 납작하게 하며 세계 정상에 올랐던 야구, 특유의 조직력을 앞세워 세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여자 구기 종목 선수들(농구, 배구, 핸드볼), 그리고 불모지나 다름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수영 박태환과 피겨 스케이팅 김연아까지... 한국 스포츠 선수들이 만들어 낸 감동 스토리는 그야말로 신화 그 자체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개발도상국, 불안한 정치적 문제 때문에 성공 개최를 장담할 수 없다고 했던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동-서 화합이라는 축제의 장으로 거듭나면서 역대 올림픽 최고 수준의 성공적인 개최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2002년 한일 월드컵은 붉은 열정을 담아 전 국민이 자발적인 응원 문화를 만들어냈고, 이는 차기 대회 독일 월드컵부터 세계 월드컵 응원의 표준으로 인정받기까지 했다. 그리고 내년 2011년에는 대구에서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가 열려 '세계 3대 스포츠 행사'를 모두 치른 전 세계 7번째 국가가 된다. 동아시아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거듭난 한국 스포츠의 다양한 성과는 진정한 세계 스포츠 탑10 국가로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한국 스포츠가 이렇게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특유의 정신력, 바로 투혼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축구국가대표팀 유니폼에 언젠가부터 새겨진 두 글자, '투혼'은 바로 대한민국 스포츠를 상징하는 단어와도 같다. 평소에 많은 기대와 관심을 얻지 못하다가 국제 대회만 되면 불굴의 의지를 앞세워 빛나는 활약을 펼치며 국민들을 기쁘게 하는 우리 선수들의 모습에는 바로 투혼 정신이 잘 담겨 있다.

투혼을 앞세워 끈질기게 상대를 몰아붙이고 마침내 성과를 내는 선수들의 표정을 통해 진정한 감동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성과를 냈을 당시에만 크게 열광할 뿐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기억 속에 점점 사라진 적이 더 많았다. 영웅을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기회를 통해 기억을 다시 되짚어보며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한국 스포츠의 투혼과 기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낸 한국 여자 핸드볼 (사진-뉴스뱅크 이미지 F, 뉴시스)
척박한 환경에서 투혼으로 이뤄낸 구기 종목

올림픽, 아시안게임만 되면 항상 반복되는 것이 있다. 메달을 따고, 그 선수의 성과를 조명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관심을 갖자',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면서 해당 종목 선수들의 처우 개선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만큼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스포츠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해도 옅은 선수층과 선수들의 훈련 환경이 오랫동안 정체기를 겪고 있는 종목도 여전히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열정, 투지를 앞세워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낸 구기 종목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지난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3회 연속 메달을 따낸 뒤 2004, 2008년 올림픽에서도 각각 은, 동메달을 따낸 여자 핸드볼이 있다. 특히 2004, 2008년 올림픽에서의 아줌마 선수들의 투혼은 감동 그 자체였고, 2004년 올림픽 팀은 영화 소재로도 활용돼 높은 관심을 얻기도 했다.

2004, 2008년 올림픽에 나섰을 당시 여자핸드볼 팀의 평균 연령은 30세가 넘었다. 노련미는 돋보였겠지만 유럽 장신 선수들을 상대로 기술이나 체력적인 면에서는 분명히 뒤질 것이 뻔했다. 하지만 아줌마 특유의 악착같은 정신을 앞세워 여자 핸드볼 팀은 세계적인 강호들을 상대로 멋진 경기를 펼쳤고, 결국 2004년에 은메달, 2008년에 동메달을 따내 금보다 값진 은, 동메달을 연이어 목에 걸었다. 이후 여자핸드볼의 세대교체가 가속화 돼 당분간 '아줌마 투혼'을 볼 수 없게 됐지만 아줌마 선수들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큼 대단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강호 네덜란드와 접전 끝에 아쉽게 패해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남자 하키 팀도 있었다. 예선 때는 2승 2무 1패로 다소 평범한 성적을 냈지만 준결승전 파키스탄과의 경기에서 육탄 방어로 파상공세를 막아낸 끝에 송성태의 골로 짜릿한 승리를 거두며 결승에 올랐다. 이어 세계 최강 네덜란드와 결승에서 만난 한국은 1-3으로 뒤진 후반초반 만회골을 넣은 뒤 종료 2분 여 전 강건우의 동점골로 3-3 균형을 이루며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인 끝에 가진 승부타에서 아쉽게 패해 은메달을 따냈지만 실업팀과 선수층이 옅었던 척박한 환경에서 보여준 선수들의 투혼은 금메달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럭비대표팀의 성과도 대단했다. 당시 아시아 최강으로 꼽혔던 일본에 비해 팀도 적고 맨땅에서 훈련을 해야 했던 선수들은 조직력과 투지만 갖고 아시안게임에 나서 메달을 노렸다. 하지만 그들의 조직력은 경기를 더해갈수록 더욱 강해졌고, 마침내 7인제, 15인제에서 일본을 제치고 모두 금메달을 따내며 환하게 웃었다. 당시 럭비 대표팀의 투혼은 공익광고 소재로도 활용돼 IMF 국제금융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 희망 스토리로 알려지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는 젊은 태극 낭자들이 큰일을 냈다. 20세 이하(U-20) 여자 월드컵에서 U-20 여자 대표팀이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 대회 출전 최초로 3위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관심도 얻지 못했지만 유럽, 남미의 웬만한 팀 이상의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보여주며 세계 강호들을 잇달아 완파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이 순간을 위해 달려온 지소연은 이 대회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골키퍼 문소리, 미드필더 김나래 등도 새롭게 주목받으며 한국 여자 축구의 미래를 밝혔다.


부상의 아픔을 참고 이뤄낸 기적들

▲ 1988 서울올림픽에서 붕대 투혼을 딛고 레슬링 금메달을 따낸 한명우 (사진- 뉴스뱅크 이미지 F, 조선일보)
스포츠 경기를 하다보면 선의의 경쟁을 펼치다가 갑작스럽게 다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정도가 심하면 아예 경기를 뛰지 못하거나 나아가 선수 생활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만큼 선수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경기에 나서고, 그것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강한 정신력과 의지가 뒷받침돼야 한다.

하지만 심각한 부상을 무릅쓰고 새로운 기적을 이뤄낸 선수들도 있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흘린 땀방울이 빚어낸 투혼이 부상을 이겨내는 큰 힘으로 이어진 것이다.

1984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서 레슬링 자유형 86kg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유인탁은 시상식에서 휠체어를 타고 나와 관중들을 숙연케 했다. 예선전에서 허리를 다쳐 제대로 일어날 힘도 없었음에도 부상을 숨기고 마지막까지 경기를 치른 끝에 미국 선수를 제치고 금메달을 따냈다.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목표를 향한 집념과 투혼이 빚어낸 성과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도 이와 비슷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레슬링 자유형 82kg급에서 붕대 투혼을 불사르며 금메달을 목에 건 한명우가 그 주인공이었다. 예선에서 머리를 다쳐 어쩔 수 없이 임시방편으로 붕대를 감아야 했던 한명우였지만 시선이 가리는 불편함 속에서도 남은 경기를 모두 이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년이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태권도 여제(女帝) 황경선이 부상을 무릅쓰고 기적의 금메달을 연출해냈다. 여자 태권도 67kg급에서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황경선이었지만 8강전에서 무릎 인대를 심하게 다치면서 정상적인 경기를 소화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고 나중에 털어놨지만 그래도 금메달을 향한 그녀의 집념은 대단하기만 했다. 결국 4강, 결승에서 한쪽 다리로만 승부를 펼쳤음에도 잇달아 상대를 이기면서 기적같은 금메달 드라마를 쓰는데 성공했다. 귀국길에 올랐을 때 그녀는 목발을 짚어야만 이동이 가능할 만큼 몸이 불편했지만 강한 목표 의식이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됐다.

하지만 이보다 더 한 선수도 있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100kg급 금메달을 따냈던 송성일은 위 통증을 무릅쓴 투혼으로 기적같은 성과를 낸 선수였다. 그러나 아시안게임 직후 위통증이 더욱 심해져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결과 위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암세포가 퍼지는 순간에도 그는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 열심히 땀흘렸던 것이다. 금메달을 따낸 의지만큼 병마와도 싸워 이기겠다는 집념이 강했던 송성일이었지만 결국 그는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낸 뒤 3개월 만에 안타깝게 생을 마쳐야 했다. 몸이 아픈 가운데서도 끝까지 매트에서 몸을 불살랐던 송성일의 투혼은 한국 레슬링 뿐 아니라 스포츠 전체에도 큰 본보기가 되고 있다.

▲ 사진-뉴스뱅크 이미지 F, 스포츠조선
지난 2월에 열린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건 이상화의 발바닥(사진-뉴스뱅크 이미지 F, 스포츠조선)이 화제가 된 바 있었다. 굳은살이 잡혀 울퉁불퉁한 모양을 보였던 그녀의 발바닥은 얼마나 힘들게 훈련하고 연습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많은 사람들에 감동을 자아내게 했다. 박지성의 울퉁불퉁한 발등, 김연아의 핏줄이 강하게 잡힌 발등 역시 세계 최고가 되기까지 많은 노력을 한 흔적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화려한 기술보다는 강한 정신력과 투혼을 앞세워 잠재돼 있던 능력까지 발산해 내는 한국 스포츠 선수들의 성과는 자라나는 스포츠 선수들에게도 분명히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한국 스포츠를 돋보이게 하는 힘, 투혼은 앞으로도 더 많은 기적과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고 미래를 더욱 밝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 이 글은 체육인재육성재단 블로그 '스포츠둥지'- 스포츠 둥지 기자단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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