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슈퍼스타K>에서 있었던 일이다. 심사를 보던 엄정화가 갑자기 옛날 얘기를 했다.

“근데 우리 옛날 가수들 있잖아요. 오빠(이승철)도 그렇고 더 위로 올라가면 윤시내, 나미. 그런 감정들 장난 아닌 것 같아. 어떻게 그렇게 했지?”

심사를 보던 사람들이 모두 공감하며 옛날 얘기에 빠져드는 장면이 나왔다. <슈퍼스타K>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최고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심사를 하자면 당연히 노래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노래 실력이 최고였던 시절이 떠올랐을 것이다.

정말 과거의 가수들은 노래 실력이 지금과는 차원이 달랐다. 단순히 노래를 잘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카리스마에서 격이 달랐던 것이다. 컬러TV, 비디오 시대가 시작됐다는 1980년대에도 당대 청춘스타들이 실력까지 갖춘 경우가 많았다.

먼저 80년대의 황제로 군림했던 조용필을 꼽을 수 있겠다. 조용필은 그야말로 가왕(歌王)이었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에 소름이 끼쳤던 경우다. 노래실력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의식이 충만한 창작자이기도 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조용필 40주년 기념 콘서트를 보며 그의 음악세계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가수가 당대 최고의 대중스타로 군림했던 시대.

10대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이선희의 경우도 가창력과 카리스마에 있어서 최고 수준이었다. 엄정화가 언급한 윤시내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요즘 순위프로그램에 윤시내 같은 가수가 나오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당시엔 그런 가수가 1위를 했었다. 나미나 민혜경 등은 당시엔 젊은 사람들을 위한 가벼운 노래를 한다고 간주됐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이들도 장인의 반열이었다.

80년대 중반 이후엔 이문세나 들국화가 최고의 스타였다. 이들의 노래는 수십 년이 흘러도 묻히지 않는 명작들이다. 들국화 같은 밴드가 인디밴드가 아닌 최고 스타 밴드로 대접 받았던 시대가 우리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이때 임재범, 서태지, 김종서 등을 배출한 시나위가 나왔고, 이승철, 김태원의 부활도 인기를 끌었다. 요즘 같아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과거 이 땅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가수가 음악하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이란 것에 확고한 합의가 있었다. 그중에서 가창력이 조금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로 기본 이상은 했고, 스스로 자신의 노래를 창작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지금은 노래하는 사람의 카리스마를 전혀 느낄 수 없다. 아이돌의 경우는 음정만 안 틀리면 노래 잘 한다고 박수 쳐주는 분위기다. 가수 타이틀을 가지고 예능프로그램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노래를 시킬 때면 시청자인 내가 조마조마할 정도로 가창력이 불안하다. 그래서 MR제거 놀이가 인기를 끄는 것이다.

음악적 자의식, 창작능력 따위는 감히 바랄 수도 없는 분위기다. 트렌드에 맞춰 회사가 기획해준 노래만을 부르는 가수들 앞에서 무슨 자의식, 창작을 논한단 말인가.

- 걸그룹의 해외 성공, 독 될 수 있다 -

한동안 아이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셌었다. 하지만 최근 세계적인 팝시장인 일본에서 우리 걸그룹이 파란을 일으키고 심지어 미국에서마저 SM 아이돌들이 인정받았다는 소식들이 전해지면서 아이돌 특히 걸그룹에 대한 평가가 급변하고 있다. 이젠 그들의 실력, 국제경쟁력에 찬사가 쏟아진다.

어제 우리 걸그룹의 한류열풍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기사가 포털에 실렸었다. 얼마 전까지는 이런 기사에 걸그룹의 실력을 비웃는 댓글들이 상당수 달렸었지만 이젠 달랐다. 우리 걸그룹이 실력까지 갖췄다며 기자를 비난하는 댓글들이 대다수였다. 이렇게 걸그룹의 성공에 박수만 치고 있어도 되는 걸까?

물론 한국의 아이돌들이 그동안 저평가된 면은 있다. 그들이 최소한 5초 가수, 붕어 가수란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이 아니란 것은 확실하다. 소녀시대나 슈퍼주니어의 상당수는 솔로곡을 소화할 능력이 된다. 안무와 노래를 함께 소화하는 능력과 비주얼을 합쳤을 때 확실히 한국의 아이돌에겐 경쟁력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에게 순수한 가수로서의 카리스마를 따질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만약 다른 ‘정상적인’(?) 가수들이 있고 거기에 아이돌들까지 있는 상황이라면 상황은 덜 심각하다. 문제는 우리 가요계에 이제 아이돌이나 그에 준하는 비디오형 가수들밖에 안 남았다는 데 있다.

이대로 아이돌들이 해외에서 얻은 인기와 인정을 발판으로 한국에서 더욱 그 위치를 공고히 하면, 우리 가요계에 엄정화가 감탄했던 것과 같은 가수들은 더욱 씨가 마를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음악적 황폐화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걸그룹의 해외 성공에 취할 때가 아니란 소리다. 그것과 별개로 우리 가요계와 아이돌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걸그룹 일본 진출 이후로 그 비판조차 막히는 분위기가 전개되고 있다. 이건 문제다. 이렇게 되면 해외에서의 성공이 우리 내부의 독으로 작용할 것이다.

80년대 가왕들의 시대. 그리 먼 옛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 다른 나라 이야기도 아니다. 불과 얼마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일들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우리가 노력하면 재현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걸 위해서라도 걸그룹의 성공에 도취하기만 해선 안 된다.

문화평론가, 블로그 http://ooljiana.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성룡과 퀸을 좋아했었고 영화감독을 잠시 꿈꿨었던 날라리다. 애국심이 과해서 가끔 불끈하다 욕을 바가지로 먹는 아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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