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 미주의 행복은 진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진희가 어떤 고통을 받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미주는 그 착각의 크기만큼 행복할 수 있었다.”

최은영 소설가의 최신작 <내게 무해한 사람>의 단편 ‘고백’ 중 일부다. 고교 때 삼총사 중 하나였던 진희에 대해 미주가 생각하는 부분이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 그럴 수도 없을 거라서’ 무해한 사람. 그러나 진희는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고백한 후 미주와 다른 친구의 반응에 절망한 뒤 자살을 택한다. 먼 훗날에야 미주는 그 무해함이 일방적인 희생이었음을 깨닫는다.

8일 인천 동구 동인천역 북광장에서 열린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났다. 천여 명의 기독교 단체들이 “사랑해서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합법적인 행사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온갖 욕설은 물론 폭력을 휘두르고, 성희롱과 성추행을 일삼고, 축제 참가자들을 둘러싸 늦은 밤까지 고립시켜 화장실 이용 및 식사를 막았다는 공통된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기름통을 가져와 방화하려 하고 실신해 응급실에 실려가는 사람을 두고 조롱까지 했지만 경찰은 이들의 폭력을 방관했다고 한다.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반대집회를 연 기독교 단체의 모습(연합뉴스)

퀴어문화축제는 일 년에 단 한번, 퀴어에 대한 세상의 억압과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퀴어와 앨라이(ally, 차별의 당사자가 아니면서 그 차별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마음껏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성 소수자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날이다. 하지만 기독교 단체들은 퀴어문화축제 때마다 반대집회를 열고 방해를 하며 이들을 다시 ‘벽장(성 정체성, 성적 지향을 숨기는 것)’ 속에 갇혀 있도록 압력을 주고 있다.

‘존재의 가시화’는 첨예한 정치적 문제다. 어떤 존재가 없다고 인식하게 되면 문제를 없다고 치부하게 되거나, 주변화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스란히 차별로 이어진다. 그래서 퀴어들은 퀴어퍼레이드 축제에서 더욱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보다 화려한 드랙퀸 분장을 한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이들이 몸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투쟁이자 저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를 인정하지만, 굳이 왜 드러내냐’는 말도 결국 차별이다. 다른 존재와 마주할 때의 불편함을 전혀 감당하지 않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페미니스트 대통령 선언 직후 한 레즈비언이 "왜 성평등 정책 안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성평등을 포함하지 못하느냐”고 묻자 문 후보가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를 드리겠다"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 ‘나중에’의 결과 ‘차별금지법’의 제정, ‘양성평등기본법’을 ‘성평등기본법’으로의 헌법 개정이 모두 무위로 돌아간 상태다. 이번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혐오 세력의 방해, 공권력의 방관도 마찬가지 결과다.

‘예수지옥 불신천국.’ 기독교 단체들이 이웃사랑은커녕 헌법에 명시된 각종 기본권마저 제한하며 각종 폭력이 자행된 이날 동인천역 북광장은 흡사 지옥이었다. 폭력을 휘두르고 혐오발언을 내뿜는 기독교인들은 ‘악귀’나 다름없었다. 상대가 나와 동일해질 때, ‘무해할 때’만 발휘하는 이웃사랑은 얼마나 얄팍한가. 그런 사랑만 있는 곳이 천국이라면, 아무도 다르지 않고 아무도 불편하지 않아야 하는 그곳은 기독교 판 ‘멋진 신세계(Bible New World)’가 아닌가.

그리고 공권력은 이 지옥을 지키는 수장 같았다. 시위 방해를 방관한 경찰도 그렇지만, 특히 허인환 인천 동구청장이 그랬다. 허인환 동구청장은 관련 조례 등의 근거 없이 동인천역 북광장에 대한 사용 불허 결정을 내리고, 광장 광고판에 사용허가 최종 불허 광고까지 내보냈기 때문이다. 2천여명의 많은 인원이 참가해 보행과 차량통행에 불편을 줄 수 있다는 ‘안전상의 이유’를 내세웠지만, 지난 5월 같은 장소에서 진행해 이틀간 12만명이 다녀간 화도진축제는 허가했었다. 반면, 하루 2천 명이 참여하는 행사를 불허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혐오 세력들에게 집회를 반대할 좋은 구실이 되어 주었다. 이번 폭력 사태에 대해 방관한 경찰과 허인환 동구청장의 책임은 적지 않다.

오히려 이번 시위를 계기로 다음 인천퀴어문화축제 때 적극 참가하겠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앞으로 퀴어들이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일방적인 희생으로, 누구에게도 ‘불편감’을 주지 않는 일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퀴어와 앨라이들이 이번 시위 마지막 구호로 외쳤던 “우리는 여기 있다”처럼, 계속 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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