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호들갑을 떨고, 기대감을 잔뜩 부풀리며 시작했지만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는 정상에 오르기 힘든 악조건에서 출발한 드라마입니다. 경쟁자인 제빵왕 김탁구는 이미 시청률 30%를 넘어 40%를 향해 가는 중이었고 (지금은 50%를 넘보는 상황이죠;;) 한번 불붙기 시작한 시청률 순풍은 좀처럼 꺼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작가인 홍정은, 홍미란 자매의 필력은 독특하고 개성 있지만 폭넓은 시청자들에게 사랑받기에는 너무 재기발랄하고 톡톡 튑니다. 공존의 히트작인 환상의 커플 이후로 쾌도 홍길동과 미남이시네요는 열광적인 팬들의 반응과는 별개로 시청률 면에서는 아쉬운 것이 사실이구요.

게다가 드라마의 구조도, 내용 전개도 답답할 정도로 뻔하고 예상 가능한 경로로 흘러갑니다.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단순한, 철없는 부잣집도련님과 세상에 나온 미녀 구미호의 러브스토리라는 기본 틀에 홍자매의 재치 있는 위트가 섞였다는 전제조건만 안다 해도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내용들이에요. 스타일이 확실하다는 것도 중요하고 몇몇 장면들의 아이디어는 여전히 매혹적지만, 이 드라마에는 기대할 만한 별다른 긴장 요소도, 주목할 만한 갈등의 고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미호가 자신의 사랑을 찾아서 인간이 되길 원한다는, 뻔한 해답을 향해 해피 앤딩이냐 베드 앤딩이냐의 갈림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할 뿐이죠. 10% 초중반 내외의 시청률이 아쉽지만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드라마의 출연진에겐, 특히 이승기에겐 뼈아픈 패배라 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내용이 아닌 캐릭터, 특히나 남녀 주인공의 개인적인 매력을 극대화하는 것에 쏠려 있으니까요. 그 방향은 오랫동안 CF 스타에만 머물렀던 신민아의 의외의 매력을 발견하는 것에 쏠려 있지만 그녀의 다소 지나친 별스러움을 빛나게 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승기의 몫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많은 부담감과 책임감을 짊어지고 있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이승기에요.

주위를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변희봉, 성동일, 윤유선 같은 쟁쟁한 관록의 배우들이 뒤를 받치고 있다고 하지만 이들은 중심 스토리 라인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 감초 같은 웃음과 재미를 유발하기 위한 주위의 사람들로만 기능할 뿐입니다. 이승기와 신민아를 제외한 젊은 배우들은 연기 경험이 일천하거나 시청자들에게도 낯선 신인급 배우들이구요. 시청자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줄 이들의 능력이 부족한 만큼 관심과 초점은 어디까지나 이승기와 신민아 두 사람에게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근래 들어 이렇게까지 연기자 개인의 매력에만 호소하는 드라마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이죠.

그런데 이 막중한 책임감을 연기 경력을 시작한 지 별로 되지도 않은 이승기는 넉넉하게 받아 넘기고 있습니다.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신민아가 집중하는 대상은 오로지 이승기 뿐입니다. 도통 잘 살아나지 않는 기묘한 러브라인인 노민우와의 관계를 제외한다면 그녀의 드라마 속 관계는 오직 이승기를 통해서만 이어져 있고 그를 통해서 각종 사건들이 진행되죠. 하지만 이승기가 챙기고 조절해야 하는 관계는 신민아 외에도 매우 복잡하고 다양합니다. 이 드라마에서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도를 선을 따라 그려보면 그 중심에는 이승기가 놓여져 있어요.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이야기의 화자는 언제나 이승기이고, 즉 구미호를 여자친구를 둔 남자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그녀의 알 수 없는 매력에 매혹당하는 남자의 모습과 그로 인한 해프닝이 내용의 핵심 줄기인 셈이죠.

그러니 아무리 시청률이 아쉽다고 해도 이승기로서는 전혀 손해 보는 패배가 아니라는 말이죠. 이미 김탁구의 위세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니 시청률에 대한 부담감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넘길 수 있고, 캐릭터의 힘에 이끌린 재방송의 높은 시청률도 그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하나의 좋은 명분이 될 것이구요. 게다가 그의 나이 또래 남자 배우들이 흔하게 겪을 수 없는, 미니시리즈의 핵심 존재로 부각되어 자신의 매력을 극대화시킨 작품을 이끌어갈 수 있는 경험은 매우 소중한 자산입니다. 찬란한 유산 때와 같은 설정의 철 없는 부잣집 도련님이지만 넉살과 귀여움을 장착한 또 다른 연기 변신은 그가 앞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배역의 폭을 넓힌 것이기도 하구요.

김탁구가 끝날 때까지 선두자리를 넘보는 것은 불가능해보이고, 그 무시무시한 기세 앞에서 10%의 벽을 지키는 것이 우선순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배우 이승기에겐 별다른 타격이 없어 보이는 이유에요. 이 똑똑하고 성실한 청년은 흥행배우라는 타이틀을 이어가는 데는 실패했지만 지고도 이긴 것 같은 성과물들을 이미 차곡차곡 모으고 있습니다. 매번 대박 성공을 기록하며 어린 나이에 황제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별칭을 얻은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어쩌면 이런 조금은 아쉽지만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실패가 아닐까요? 그의 예능 선생님 강호동의 명언 버릇을 빌려서 말하자면 사람은 성공보다는 실패에서 배우는 것이 더 많으니까 말이죠.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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