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 정권의 경제정책 기조를 외울 정도가 되었다.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의 3대 축이 핵심이다. 3대 축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돼있다. 그래서 하나라도 빼고 말할 수가 없다.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것처럼 소득주도성장은 폐기하고 혁신성장만 하라는 것은 이 정권의 경제정책 기조를 포기하라는 것이나 같다.

보수세력의 공격은 그렇다 치고 정권이 내놓은 로드맵을 스스로 부정하는 수순에 들어간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진행된 더불어민주당 의원 워크숍에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소득주도성장론의 당위성을 설명했는데, 이에 대한 불만 섞인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언론 보도를 보면 일부 중진 의원이 “이론과 현실의 괴리가 크다”고 한 걸로 돼있는데, 소득주도성장론이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을 에둘러 한 것이나 다름없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가운데)이 31일 더불어민주당 2018년 정기국회 대비 워크숍에서 소득주도 성장과 정부 정책 방향에 대해 비공개 설명을 마치고서 행사장을 빠져나오고 있다.

1일 당정청 전원회의를 통해 재확인 됐듯 문재인 대통령은 소득주도성장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의사를 반복해서 밝히고 있으나 ‘허들’을 낮추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달 29일 김현철 청와대 경제보좌관이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을 보면 “소득주도성장은 엄밀히 말하면 이전 정부에서도 추진됐던 정책”이라고 돼 있다. 김현철 경제보좌관은 “농가소득을 증대시킴으로써 취약부문의 소득분배를 개선하거나 자동차 특별소비세 인하와 같은 정책들도 광의로 보면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하나였다”, “박근혜 정부에서 양극화 완화를 위해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추진한 3종의 가계소득 증대세제(근로소득 증대, 배당소득 증대, 기업소득 환류) 역시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썼다.

김현철 경제보좌관의 설명대로 하면 정부의 보조금 지급이나 일부 세목에서의 세율인하 및 소득공제 확대 등도 모두 소득주도성장이다. 박근혜 정권의 ‘초이노믹스’까지 거론한 걸 보면 배당 확대를 포함해서 단순히 ‘소득’을 늘려주면 무조건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정부가 보수세력의 비판에 내놓은 답은 소득주도성장론이 단순히 경제주체들의 소득을 늘려주는 것에 국한된 게 아니라 사회안전망 강화 등을 포괄하는 일종의 총체적 비전이라는 거였다. 그런 차원에서 김현철 경제보좌관의 글은 그간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든다. 단순한 정권 지지자가 아니라 청와대 경제보좌관이 이런 주장을 일간지에 기고한 맥락은 결국 앞으로의 소득주도성장도 기성의 경제정책과 그다지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신호를 주자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애초에 문재인 정권이 소득주도성장을 내세웠을 때 두 가지 차원의 기대를 가졌다. 첫 번째는 경제 패러다임의 명백한 전환의 시도이고 두 번째는 적어도 글로벌 금융위기의 이후 국면이라는 특성상 과거와 같은 재정건전성과 긴축에 기대지 않는 정책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이다.

먼저 첫 번째 기대에 대해 말하자면, 많은 ‘전문가’들이 경제 패러다임의 획기적 전환은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단지 소득을 늘리는 것만으로 성장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혁신성장이 필요하다. 또 자영업자 비율이 과다한 현실에서 소득 증대의 대상이 노동자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므로 공정경제가 필요하다.

문제는 구체적 대목으로 들어가면 각각의 정책이 상호충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업은 노동자의 임금인상과 고용안정성 증대가 생산성 증대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노동자 역시 기업의 생산성 증대 시도가 고용안정을 해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반발할 수 있다. 최저임금 인상 논란에서 보듯 중소기업주나 자영업자의 처지 개선은 임금인상에 의해 중화된다. 기업과 자영업자가 한 편에 서고 노동자와 이해관계를 다투게 되면 악순환이 될 수밖에 없다.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회적 합의’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후 업무지시 1호가 국가일자리위원회 설립이었고, 이 기구가 전면에 내세운 게 ‘노사정 대타협’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 정권의 정책적 로드맵을 설계한 김진표 당시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은 지난해 5월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재벌 개혁과 경제민주화와 같은 개혁이 (노동개혁과) 삼위일체가 되어야 노사정 대타협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과 독일의 ‘하르츠 개혁’이 함께 언급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사회적 합의를 통한 기득권의 양보로 일자리를 늘리고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소 또는 개선하는 방안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문재인 정권의 경제정책적 목표는 과거 참여정부도 주장했던 이른바 ‘유연안정성 모델’의 달성이고 소득주도성장은 이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조직된 노동운동의 입장에선 사회적 합의 모델에 흔쾌히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첫째로 김대중 정부 시기 노사정위를 둘러싼 갈등에서 보듯 결과적으로 국가-자본 동맹의 ‘개혁’에 노동조합이 들러리 역할을 하게 될 수 있다는 경계심이 있다. 둘째로 사회적 합의 모델이 성공적으로 작동하더라도 종국에는 조직 노동자가 일정한 양보를 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그런 한계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2018년 현 시점에선 사회적 대화를 마냥 반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첫째로는 한때 신자유주의라고 불렸던 성장모델이 퇴조해 정권이 추진하는 ‘개혁’의 내용이 과거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 그렇고, 둘째로는 실제 노동계급 내의 양극화로 인한 분화가 외면할 수 없을 정도의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이 정부가 재벌 개혁이나 경제민주화와 같은 대목에서 확실한 진전을 봤더라면 사회적 합의 구조는 의외로 쉽게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집권 2년차를 몇 개월 더 지난 지금까지 이 정부가 실제 이룬 것은 최저임금 인상과 이의 효과를 축소하기 위한 산입범위 조정, 규제완화 등을 앞세운 대기업 의존으로의 급속한 복귀다. 알맞은 조건이 형성된 상황에서라면 조직된 노동조합 세력이 사회적 대화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어려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도 전에 이미 산통은 깨져 버렸다. 획기적인 계기가 없는 한 앞서 언급한 로드맵의 작동은 어려울 것으로 전망한다.

그럼에도 소득주도성장에 남는 기대가 없는 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두 번째 기대인 확장적 재정정책을 통한 경기운용이라는 면에서 그렇다. 주류 내에서도 긴축이라는 신화가 깨졌기 때문에 재정을 써야 한다는 대략의 공감대는 존재하는 걸로 보인다. 실제 정부는 그런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주장하고 있고 앞서 김현철 경제보좌관의 글도 비슷한 차원의 얘기로 들린다.

그런데 이런 기조가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증세 논의가 불가피하다. 이에 대해서는 김동연 경제부총리도 장기적인 증세 논의의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정권이 하는 일은 증세 프로세스와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유력한 증세 대상으로 꼽혔던 부동산과 금융소득에 대한 과세는 소폭 인상과 현상유지에 그쳤고 그 결과가 최근의 부동산 논란으로 번진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연 2천만원 이하의 임대소득 과세는 임대사업자 등록 유도를 위해 사실상 없는 일이 됐지만, 정부는 지난달 31일 임대사업자에 대한 세제 혜택의 일부 축소를 다시 시사했다.

잘못된 일은 바로잡는 게 좋지만, 이 사례는 본질적으로 증세가 아니라 ‘투기’에 방점을 찍고 정책을 운용하고 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대증요법’만으로 대응하니까 부동산 문제도 악화된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소득주도성장론도 마찬가지다. 경제정책의 성과를 내는 것에 있어서 정부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는 핑계로 대증요법으로만 임기 5년을 다 보내면 그 다음에 우리가 눈앞에 마주할 것은 보다 시장주의적으로 급진화 된 대중이다. ‘대의’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됐다고 주장하며 “부자되세요”에 매혹되는 바로 그 사람들 말이다.

변화된 정치지형 탓에 ‘제2의 이명박’은 야권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나올 수 있고 이는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상징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런 일이 되어서는 안 되고 적폐를 청산한 문재인 정부는 성공한 걸로 역사에 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할 일은 후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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