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진행되면서 각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극 초반의 캐릭터가 변하는 경우는 부지기수입니다. 그/그녀가 처한 상황이 바뀔 수도 있고, 어떤 결정적인 계기로 인성은 물론 인간 전체가 변할 수도 있는 법이죠. 점 하나만 찍어도 멀쩡한 사람을 몰라보는 드라마 속 세상에서 누군가가 완전히 변해버렸다는 것은 그리 탓할 일은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변신 그 자체가 아닌 그 변화를 납득시킬 수 있는 개연성과 설득력, 그리고 그런 변신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그만의 매력과 호소력입니다.

제빵왕 김탁구 역시 극중 시간의 흐름, 여러 가지로 뻗어난 사건들 때문에 등장인물 모두가 변하고 바뀌고 성장하거나 퇴보했습니다. 거리의 부랑아에 불과했던 김탁구의 예전 모습과 거성가로 들어가 일전을 각오하는 그를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긴 어려울 거예요. 그의 엄마도 아빠도 다르지만 어찌되었든 동생인 라이벌 구마준도 그와 발을 맞추며 점점 변하고 있구요. 그 두 사람 뿐이랍니까. 24회, 첫 방송 이후 2달여가 지나는 동안 거성가의 사람들도, 팔봉 빵집의 사람들도 모두가 조금씩 바뀌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니까요.

그런데 이런 변화 속에서도 유독 탐탁지 않은, 가면 갈수록 처음 빛을 내던 매력이 퇴화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김탁구의 여자에서 이젠 구마준의 예비 신부로 갈아탄 신유경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남자를 갈아 치우는 것이야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이 아가씨에겐 그럴만한 충분한 명분과 설득력 있는 배경이 있습니다. 지켜보는 시청자의 입장에서야 선하디 선한 주인공 김탁구를 떠나 악역 구마준의 품에 안긴 결정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런 아슬아슬한 애태우기가 드라마 속 러브라인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인 것은 사실이잖아요?

하지만 문제는 그런 신유경의 변심이 아닙니다. 김탁구에서 구마준으로, 착하고 억센 똑순이에서 서인숙에게 설욕을 꿈꾸는 악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까지도 충실하게 살아있던 그녀의 캐릭터가 정작 그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구마준의 여자가 되어 버린 지금엔 그 빛을 잃어 버리고 말았어요. 불공평한 세상을 향해 힘껏 저항하고 몸부림쳤지만 결국은 투항해버린 그녀에게, 이제 찾을 수 있는 매력이란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고작해야 구마준의 외로움을 감싸 안아 주는 위로자의 역할 외엔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아요.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던 자신의 의지도 꺾고, 어린 시절부터 소중하게 간직해오던 사랑까지 버려가며 택한 악녀의 길이건만 정작 신유경이 하는 것은 구마준의 지시대로 얌전히 따라가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런 저런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하지만 그 과정에서 신유경만의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는 여지는 없어요. 구마준이 그녀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고, 그녀 역시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지만 그 이후 그녀의 행동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한 평범녀일 뿐입니다.

물론 이런 순종, 혹은 침묵의 시간은 김탁구에게서 떠나 구마준에게 점점 더 동질감을 느끼는 과정이기도 하고, 그렇게 필요에 의해 선택했지만 결국 이해와 동정, 그리고 사랑에 빠지는 조금은 뻔한 내용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밋밋하게 그저 구마준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면 이미 김탁구-양미순, 구마준-신유경으로 러브라인이 확고하게 굳어지고 있는 이 드라마에서 그녀는 엄마를 향한 구마준의 복수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밖에는 기능하지 못해요. 이렇게 평범하고 재미없는 인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해요.

그것은 비단 신유경이라는 인물 하나를 위해서도, 이 역할을 맡은 유진의 배우로서의 역량을 보여줄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시해진 그녀의 변화는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매력의 상당부분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빵왕 김탁구의 등장인물 중에서 불공평한 현실에 분노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은 신유경이 유일합니다. 마치 당연하게 자행하는 가진 자들의 안하무인 태도와 각종 불공평한 대우에 저항했던 유일한 인물이 이렇게 속절없이, 아무런 존재의 의미도 가지지 못하고 무너진다면 제빵왕 김탁구는 그동안 유지하고 있던 드라마의 배경인 80년대라는 시대의 분위기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격차를 두고 보여주는 여러 비루하고 잔혹한 현실을 보여주던 것들을 놓쳐버린 체 그저 재벌가 안에서만 벌어지는 권력다툼의 이야기로 빠져 버리고 말아요.

좀 더 활발하게, 살아있는 신유경의 존재감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김탁구가 거성가로 들어온 이상 거성그룹을 차지하기 위한 두 형제들 사이의 경쟁은 좀 더 뜨거워 질 것이고 서인숙과 김미순의 다툼도 격렬해질 터이니 이야기 역시도 이 부분에 집중하게 될 것이지만 이 사이사이에 그동안 너무나 조용하게 지내왔던 신유경의 목소리를 적절하게 끼워 놓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네 명의 주인공들 중에서 가장 비중이 작았던 그녀가 점점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침묵해버린다면 결국 구마준에게 딸려 있는 병풍으로 전락해버릴 테니까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의 변신이 시청자들에게 사랑받으며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얼마나 독하고 나쁘게 변하느냐가 아니라 그녀만이 가진 이유와 매력을 시청자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신유경은 밋밋한 악녀 변신은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어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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