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지사 1심 무죄 판결의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그렇잖아도 최근 민감한 사건이 많았기 때문에 이 판결은 더 많은 여성들이 거리에 나서는 방아쇠가 될 것 같다.
그런데 법조인들의 분위기는 사뭇 다른 것 같다. 14일에서 15일까지 언론에 등장한 법조인들의 이 판결에 대한 평을 종합해보면 그렇다.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죄 자체가 성인을 대상으로 적용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안희정 전 지사 재판은 무죄가 확정될 가능성이 크다는 평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노 민스 노(no means no)’와 같은 입법이 있어야 문제가 보완될 수 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물론 이런 견해들에 대해서도 반박 논리가 있다. 반드시 법을 고치지 않더라도 재판부가 적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유무죄 판단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판결에 드러난 재판부의 인식은 ‘위력’의 범위를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해석하고 ‘피해자다움’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런데 법리를 둘러싼 이런 저런 논란과 별개로 정치적 차원에서 여성들의 불만이 어디로 수렴될 것인가를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최근 법적인 차원의 ‘형평성’이 문제가 돼왔다는 사실이 그렇다.
혜화역 시위 등 여성들이 거리로 나서는 국면은 짧게 보면 홍대 몰카 사건으로부터 시작됐다. 이미 많은 남성들이 몰카를 무차별적으로 촬영하고 유포하는 게 현실인데 수사당국이 이를 내버려 두고 가해자가 여성인 사건에 대해서만 신속하고 엄중한 수사를 강행했다는 것이다. 특히 경찰이 불법 촬영 관련 혐의로 피의자를 포토라인에 세운 일은 흔치 않기 때문에 ‘형평성’에 대한 의구심은 확산되었다.
최근 이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이 징역 10개월의 실형 선고로 귀결된 것은 논란을 더 키웠다. 초범이고 반성의 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집행유예 정도의 결과가 알맞지 않느냐는 거다. 그런데도 법원이 굳이 실형을 선고한 것은 결국 피의자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냐는 해석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강하게 제기되었다.
물론 이 역시도 과도한 해석이라는 반론이 있다. 인터넷 상의 논의에선 불법 촬영의 가해자가 남성인 경우와 단순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사건의 경우 촬영뿐만 아니라 유포까지 이뤄졌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피해자와 합의하지 않으면 실형이 선고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워마드 운영자 체포영장 문제에서도 비슷한 구도가 형성됐었다. 워마드이기 때문에 과도한 조치를 신속하게 취한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에 대해 경찰은 일베 등의 다른 사례도 열심히 수사하고 있다고 답했다. 사이트 운영자가 수사 및 삭제 조치 등에 협조적이고 서버가 국내에 있는 경우는 압수수색 등을 할 수 있지만 워마드는 수사에 협조적이지 않고 서버가 외국에 있기 때문에 운영자 신병 확보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따지고 보면 다 그럴만한 이유와 사연이 있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도 ‘형평성’ 논란이 가시지 않는 건 바로 이 상황이 여성에 대한 일상적 성폭력과 불법촬영물 범람을 방치되는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나아지는 게 없는데 공권력이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반응만을 반복한다면, 현실이 바뀌길 바라는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최근 사례를 통해 지속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여성을 남성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로만 여기는 세태는 매우 뿌리 깊다는 것이며 어느 하나의 괴물을 퇴치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여성이 불법촬영물과 일상적 성폭력의 피해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갈 길이 너무나 멀고 세상이 전부 바뀌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천지개벽이 일어날 때까지 끝없이 기다려야 할까?
사실 이 구도는 오늘날 이뤄지는 정치의 여러 사례에서 동일하게 반복되어 왔다. 사람들의 불만이 쌓여갈 때 통치자와 기득권이 제대로 된 답을 내놓고 문제 해결을 하지 못하면 대중은 급진화된다.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너무나 어렵고, 최종적인 해결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쉬운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여성주의자를 자처하는 일부 사람들이 소수자나 난민 혐오로 빠지는 매커니즘이 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서구권에서 극우정치가 다름 아닌 노동자들의 의지로 확산되는 것도 같은 원리다. 과거 파시즘과 사회주의 혁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한 사람들을 상대로 “정답을 적어낼 때까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바람직한 정치가 해야 할 일은 불만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핵심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고 또 제출하는 것이다. 그래야 상황을 나쁜 방향으로 이어지도록 하지 않으면서 문제의 해결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일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늘 ‘촛불정신’을 말하는 집권 여당은 지지층을 고려한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염치를 생각한 것인지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았다. 당대표 선거에 출마한 인사 일부가 사법부에 대한 비판을 언급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비판이 목소리를 높이는 자유한국당이나 바른미래당이 여성에 대한 일상적 성폭력과 불법촬영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진보정당들도 믿음직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지금 거리로 나서겠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대변할 정치세력이 없다는 소외감과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바람직한 결말을 위해선 이런 상황은 해소돼야 한다. 불법촬영물과 일상적 성폭력에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을 반대하고 규탄하겠다며 ‘태극기 집회’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그 반대여야 한다. 정치가 이들에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계산을 하며 미온적으로 대처할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