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 실린 서평에서 '캄보디아 여행기'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에겐 '못살고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나라'로 기억되던 나라. 하지만 그 여행기 속 캄보디아는 그런 우리의 선입견이 무색하게, 우리가 잃어버린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도시 공화국이 된 대한민국에서는 사라진 것들이 아직 남아 있는 곳. 많은 것을 가지지 않았지만 가진 것들을 기꺼이 나누고, 그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곳, 그 '캄보디아 여행기'의 지은이는 반문했다. 문명적으로 발전된 이곳에서 사는 우리는 정말 행복한 것이냐고.

세계 여행기라 하면 한때는 우리보다 잘 사는 '문명국'의 기록이 당연한 것이었었다. 하지만, 우리가 제법 잘 살게 되면서 그 여행과 여행에 대한 기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발전과 성장 속에서 놓치고 잃어버린 것들을, 사람들 발길이 많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발견해내기 시작했다. 영국 드라마 리메이크를 넘어서 한국판 <라이프 온 마스>가 우리에게 전해준 찡한 정서도 어쩌면 그것이 아닐까.

화성보다 더한 88년 대한민국

OCN 주말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

조폭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강력 3반을 향해 달려가다 정신을 차린 한태주(정경호 분)가 돌아온 곳은 2018년. 그를 혼란에 빠뜨렸던 과거의 늪으로부터 건져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그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퇴원한 그가 걸음하는 곳곳에서 왁자지껄한 강력 3반 동료들이 눈에 밟힌다. 현실로 돌아왔는데, 왜 그는 행복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 답은 돌아온 그의 방에 있지 않을까? 퇴원을 하고 돌아온 그의 방은 1988년도로 잠시 회귀했던 그의 방과는 천양지차다. 그랬다. 화성처럼 낯선 88년도에 그가 머물던 방은 오래된 나무 프레임에 유리문, 촌스러운 문양의 장판과 벽지, 가끔은 새어나오는 연탄보일러, 그리고 로터리 다이얼이 툭 하고 빠지는 흑백 TV에 밍크 담요, 먼지가 켜켜이 눌러 붙은 것처럼 오래 돼서 생경했던 곳이다.

이제 '현실'로 돌아온 태주가 퇴원을 해서 온 그의 집은 너무도 멀끔하다. 블랙 톤의 정갈한 인테리어, 그 안을 채운 금속 프레임의 기능적이며 트렌디한 의자와 전등이며 부엌살림 역시 최첨단이다. 그런데, 어쩐지 그곳에 들어선 태주가 낯설다. 마치 그가 88년에 처음 도착해서 낯설었던 것처럼.

그랬다. 2018년의 태주는 사람보다는 과학적 데이터와 증거를 믿었던 사람, 그래서 출세가 빨랐지만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 심지어 약혼을 했던 연인과의 관계도 이어가지 못한 채 좌천되고 이별을 맞이해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정서와 신념이 전혀 엊물리지 못하는 88년으로 나동그라졌었다.

OCN 주말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

그가 떨어졌던 88년은 이미 <살인의 추억>을 통해 이제는 클리셰가 되다시피 한 '과학 수사'가 불가능했던 시절. 과학적 성취가 미비해서 불가능하기도 했지만, 법이나 절차보다는 강동철 과장(박성웅 분)의 손아귀가 먼저이고 익숙했던 인지 수사와 강압 수사가 익숙했던 시절. 당연하게도 한태주는 반발한다. 하지만 그런 그를 88년에 붙잡아 세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사람, 그중에서도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한태주에게 '상실된 기억'이다. 돈을 벌러 사우디로 가서 돌아가신 분, 그래서 내내 고생했던 어머니와 그를 홀로 남겨둔 '그리운 기억'이다. 88년으로 돌아간 한태주는 그저 그리움으로 남았던 '아버지의 추억' 그 실체에 봉착한다.

<라이프 온 마스>는 원작의 골격과 사건을 고스란히 쫓아가면서 그것을 88년의 공기와 사건으로 재해석해낸다. 그리고 거기에 한태주의 묻혀진 '트라우마', 아버지를 더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이제는 우리에게 88년 올림픽의 영광이라는 이름보다는 '야만과 폭압'으로 기억되는 80년대를 불러온다.

아버지의 시대, 그 시대와의 화해

88년으로 돌아온 한태주를 혼란에 빠뜨린 건 크게 두 가지이다. 2018년의 한태주의 능력이었던 '과학'이라는 것을 무색하게 만들었던 '전근대적이며 야만적인' 강동철 계장으로 상징되는 88년 식의 수사 방식과, 아름답게만 추억되었던 아버지의 실체이다.

과학적 데이터와 방식에 근거했던 한태주의 능력은 강력 3반의 일원으로 매사에 팀원들과 갈등을 일으킨다. 그것은 강동철 계장과 이용기 형사(오대환 분)의 주먹구구식, 심지어 증거 조작, 거기에 더한 폭력적인 수사 방식이 낳은 피의자의 죽음 등을 통해 극대화된다. '야만적이며 폭력적이기만' 했던 88년도의 강력 3반. 하지만 본의 아니게 같은 팀이 되어 뛰어다니는 사이, 한태주는 어느덧 그들이 지닌 '인간의 결'에 포섭되어 가고, 그들의 막무가내식 수사에 한태주의 과학 수사가 '화룡점정'이 되어 절묘한 능력의 강력 3반으로 '버전 업'되어가는 식으로 화해하게 된다.

그 엇물리며 손발 맞추어 가던 88년도의 강력 3반과 2018년의 한태주 사이에서 튀어나온 '한태주 아버지' 한충호. 조폭들의 근거지를 털러 간 나이트클럽 화장실에서 만난 아버지는 태주의 기억 속 아버지와는 달랐다. 사우디에 돈을 벌러 간 적도 없으며, 여전히 아들을 사랑하는 듯 했지만 그의 사랑은 허황됐다. 더구나 아버지는 88년도 인성시에 벌어진 연쇄살인범의 혐의까지 받게 되었으니.

OCN 주말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

아버지의 그림자를 밟으며, 아버지의 실체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한태주, 그 끝에서 그가 마주한 건 그의 잃어버린 기억 속 아버지의 '비명횡사'이다. 아들을 사랑했지만 부랑했던 아버지, 결국 그는 한탕을 위해 도모하다 연쇄살인범의 증거 소멸의 굴레에 걸려 '개죽음'을 당하고 만다.

한태주는 88년으로 돌아와 잊었던 기억의 한 장을 펼쳤지만 그곳에서 만난 건 얼룩진 역사이다. 태주의 아버지는 우리의 기억 속 80년대와 같다. 자식 세대에게 올림픽까지 치르며 ‘발전'했다며 화려하게 팡파레를 울려댔지만, 기실은 양아치 같고 한탕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시대. 성장과 번영의 80년대라는 캐치프레이즈 속에 숨겨진 야만과 폭압의 역사.

하지만 드라마는 그 비극의 폭로에서 멈추지 않는다. 아버지의 과오 앞에 망연자실한 한태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또 다른 아버지'이다. 육친의 아버지를 마주하기 위해 던져진 88년도에서 한태주를 맞이한 건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은, 강동철 계장이다. 서울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온 한태주를 보란 듯이 맥이던 강동철 계장이지만, '츤데레'처럼 한태주를 챙긴다. 절대로 ‘너가 걱정돼서’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전기구이 통닭에서 김치국물, 장모님이 싸주신 갈비찜까지 알뜰하게 한태주를 챙긴다. 도망자로 쫓기는 순간에도 아들이 원하던 딱지를 사기 위해 애썼던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이다.

88년에서 강력 3반과 함께 뛰어다니며 어느덧 풀어져가는 한태주의 모습은 결국 그가 2018년에 보여준 과학에의 신봉이 '인간애의 상실'이었음을 방증한다. 그리고 그 인간애의 상실에서 핵심은 '아버지의 상실'이었음을.

OCN 주말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

하지만 동네 양야치였던 아버지가 그럼에도 한태주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듯이, 강동철 계장이나 이용기 형사 등 그들에게는 그 과실과 함께 한태주를 회복시켜줄 '인간미'가 있었다. 초반 무조건 강동철 계장과 강력 3반에 반발하던 한태주가 그들과 자신의 과학 수사를 절묘하게 절충시켜 나가듯, <라이프 온 마스>는 그렇게 80년대와의 '화해'를 청한다. 아버지의 시대와의 화해이다. 그리고 그건 나를 번듯하게, 혹은 반듯하게 바로 세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 시대에 대한 위로이기도 하다. 정확하게는 아버지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부도덕한 아버지와 다르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듯 달려가는 이 시대 사람들에 대한 '토닥거림'이다.

2018년 현실로 돌아온 한태주는 결국 어쩌면 자신의 머릿속 망상에 불과한 그 '증상'의 시대를 향해 몸을 던진다. 이 부정의 몸짓, 그리고 그 부정의 몸짓이 향한 '부정한 시대', 드라마는 반문한다. 과연 완벽한 시대가 있겠냐고. 에어컨은커녕, 그 찌든 여름에 차 유리창을 열어 자연의 바람으로 땀을 식혀야 하는 시대. 시체 검시를 보건소에서 하는 과학과는 담을 쌓았던 시대. 함께 일하는 동료 여순경을 '양'이라 부르며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시대. 촌스러운 패션과 후진 시스템의 시대. 한태주의 퇴행 혹은 망상은 그 ‘후짐’에의 복고이다. 하지만 그건 퇴행이라기보다는, 달려가느라 놓친 '인간적 감수성'에 대한 연민이다.

그러기에 그 '복고'를 그저 망상이라 찍어 누르기엔 '행복'이 걸린다. 드라마는 내내 말한다. 그곳이 어디건, 당신이 웃고 행복하면 되지 않았냐고. 그리고 2018년에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말에 가슴이 움직인다. 어쩌면 <라이프 온 마스>의 행복은 <응답하라 1988> 속 가족 같던 이웃의 행복과 일맥상통한다. 지금 여기서 행복이 막연한 우리에게, 화성보다 가닿기 쉬운 '행복'이다. 더구나 그곳엔 여전히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와 가족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명품 영드를 2018년의 우리를 위로하는 한드로 멋들어지게 만들어낸 <라이프 온 마스> 제작진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순간을 영원히/아름다운 마음으로/미래를 만드는/우리들의 푸른꿈
어어어어어어/하고싶은 이야기/너와 내가 만들어요
우리는 모두다/사랑하는 친구들/어어어어어어/아아아 노래를/사랑의 노래를
미지의 세계를/찾아서 떠나요/사랑의 노래를/멈추지 말아요
언제나 끝이 없어라/알 수 없는 질문과 대답/
저 넓은 하늘끝까지/우리들의 사랑을 노래해요
머물곳을 찾아서/낯선곳을 찾아가서
미래를 만드는/우리들의 푸른꿈
-조용필, 미지의 세계 중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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