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제빵왕 김탁구에서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 사이에 벌어지는 러브라인이 아닙니다. 드라마 타이틀은 청춘남녀 주인공 네 사람의 얼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고 살짝살짝 이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에피소드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와 이야기들은 이 드라마의 작은 부분들일 뿐이죠. 오히려 제빵왕 김탁구는 그 제목에 걸맞게 빵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기 이전에 전달하고 싶은 것들이 무척이나 많은 짬뽕 같은 재미의 드라마에요.

이 안에는 각자가 잃어버린, 혹은 달성하거나 지키지 못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 떵떵거리며 위세를 부리며 오만하게 살아가지만 그 속에는 업신여기는 이들에게 뒤쳐져 가지지 못하고 도달하지 못한 열등감과 상실감에 못 이겨하는 불우한 악당들에 대한 이야기, 두 아들을 향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금씩 삐뚤어진 자식 사랑 이야기 등등이 가득 담겨 있어요. 다른 드라마에선 핵심을 차지하는 주인공 남녀간의 사랑이란, 그저 그 수많은 줄기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러브라인 자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수많은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주는 방식으로 멋들어지게 활용되고 있거든요. 김탁구와 구마준 사이를 오가는 애증의 관계, 어머니 서인숙과 일그러진 가족에 대한 구마준의 증오와 괴로움, 김탁구의 가족을 향한 결핍은 모두 두 여자, 신유경과 양미순을 통해 증폭되고 고조되고 또는 해결됩니다. 이렇게 사랑 그 자체에 매달리지 않으면서도 세련되게 4각 관계를 조율하는 능력은 그 설정을 핏줄에 대한 집착과 복수로 얼룩진 막장드라마에서 출발한 김탁구가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키며 인기가도를 달릴 수 있게 해준 힘이에요.

그런데 이 4각관계의 방향은 묘하게 비틀어져 있습니다. 다들 사랑을 하고 상대방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기는 하는데 그 감정 라인은 한쪽을 향해 일방적으로 쏠려 있거든요. 김탁구와 구마준 모두 신유경만 바라보고 그녀에게 애정을 쏟습니다. 김탁구는 지켜주려 하지만 실패했고 구마준은 소유하려 하지만 결국 그럴 수 없겠죠. 헌데 이렇게 신유경을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그 애정을 표출하는 두 남자들에 비해 또 다른 여자 주인공 양미순의 호감과 애정은 남자들에게 닿지 않습니다. 팔봉빵집의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의 마음 역시 구마준에게서 김탁구에게로 옮겨간 지 오래이지만 그 애정은 아쉽게도 구마준이 풋사랑 같은 그녀의 마음을 이용했던 것처럼 김탁구에게도 여동생 이상의 남녀간의 감정으로는 보답 받지 못해요.

왜 양미순, 이영아는 여자로서 사랑받지 못할까요? 그러기엔 그녀는 너무나 정상적이기 때문에, 결핍과 부족에 허덕이며 목마름을 호소하는 다른 세 명의 주인공과는 다른 안정과 행복의 틀 안에 있기에 그것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 명의 개인으로 저마다의 고민을 해결하고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이영아가 연기하는 양미순은 개인으로서의 감정과 팔봉 빵집의 일인으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감당해야 합니다. 즉 그녀의 캐릭터는 한 여자로서의 감정과 함께 두 남자 주인공 모두에게 부족한 완벽하고 온전한 가족, 팔봉빵집의 여동생의 모습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안온함을 깨어 버리기엔 두 남자 모두 그 공간을 사랑하고, 어쩌면 다가가기 두려워해요.

양미순을 사랑하고 그녀에게 애정을 표시한다는 것은 팔봉빵집의 진정한 일원으로 편입된다는, 그 공간 자체에 완전히 동화되어 다른 구성원들과 자신을 온전히 동일시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두 명 모두가 불안정하고 힘겨운 현실과 마주하고 있기에 그토록 갈구하는 그 안온한 공간을 일그러뜨릴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구요. 구마준은 그럴 수 없기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 버렸고, 김탁구는 양미순에게 끝까지 남자가 아닌 오빠로서 자신의 존재를 한정시키며 무의식적으로라도 팔봉빵집의 기존 구도를 지키려 합니다. 두 남자에게 양미순은 한 사람의 여자이기 이전에 팔봉빵집 그 자체이고 그러기에 감당하기엔 너무 커다란 존재일지도 몰라요.

너무나 사랑스럽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사랑받기 어려운 여자 주인공. 이영아의 양미순은 제빵왕 김탁구에서 그런 애매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팔봉선생의 명예를 지키겠다고 나선 김탁구의 외침은 양미순과의 관계가 더더욱 깊어지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녀의 사랑이 된다는 것은 결국 팔봉빵집의 후계자로서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다만 조금 더 갈등을 만들어내며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러브라인이 점점 더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 같아 아쉽긴 하지만 말이죠. 뭐, 이야기가 너무 많은 잔가지로 뻗고 있으니 서서히 그 가지를 정리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에요. 게다가 아무리 봐도 상처 투성이의 김탁구에겐 같은 상처로 괴로워하는 신유경보단 그를 따스하게 품어줄 수 있는 양미순이 더 어울리지 않나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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