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의 페이스북 글이 논란이다. 노회찬 의원의 사망을 두고 “자살을 미화하는 잘못된 풍토를 고쳐야 한다”고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거론할 가치가 없는 말이라며 분노하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그저 그렇게 대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홍준표 전 대표의 이 말이 어떤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홍준표 전 대표의 말과 유사한 주장이 국회에서도 나온 바 있다. 주인공은 역시 자유한국당 소속인 장제원 의원이다. 장제원 의원은 김선수 대법관 후보자 청문보고서 채택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의원이 “청문회 중 안타까운 비보로 인해 정의당은 상주를 하고 있고 많은 국민들이 빈소를 찾고 있다”고 하자 “언제까지 감성팔이 할거야”라며 볼멘소리를 했다.

이재정 의원이 굳이 노회찬 의원 사망을 언급한 것은 쓸데없고 실익이 없는 정쟁을 동료 의원과 국민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취지였을 것이다. 자유한국당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어쨌든지 표결에 불참하거나 반대하거나이다. 평상시라면 ‘여론전’이란 차원에서 여러 기기묘묘한 장면을 연출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렇잖아도 국민이 슬픔 속에 잠겨있는 상황에선 깔끔하게 가자는 얘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물론 이런 주장과 인사청문특위의 의사진행에 대해 장제원 의원이 나름대로 주장도 하고 반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짚어 보려는 것은 굳이 그런 주장과 반론이 ‘감성팔이’라는 단어로 표현된 배경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감성팔이’라는 개념은 이성과 합리가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사실관계를 호도해 이득을 얻으려 하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요즘은 ‘선동’이란 단어도 같은 의미로 통용된다. ‘팩트’와 ‘선동’의 대립구도를 가장 적극적으로 재생산해온 것은 극우적 세계관에 동조하는 네티즌들이 즐겨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인 ‘일베’이다. 이들은 늘상 선동에 능한 좌파들에게 속지 말고 객관적인 ‘팩트’를 통해 민주화 세력의 이중성을 간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팩트’를 활용해 적극적으로 ‘선동’의 논리를 시원하게 반박하는 걸 ‘팩트폭행’이라고 한다. 이제는 인터넷 전반에서 널리 쓰이는 개념들이다.

홍준표 전 대표의 자살미화론도 같은 맥락에 있다. 만약 누군가 자살을 미화한다면 거기에는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 홍준표 대표는 이어서 올린 글에서 “맞는 말도 막말이라고 폄훼하는 괴벨스공화국이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홍준표 전 대표의 세계관에서 ‘자살을 미화’하는 것은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선동가의 역할을 자처하는 ‘괴벨스’이다. 앞서 장제원 의원의 사례나 일베의 논리와 함께 보면 어떤 정치적 일관성 같은 걸 느낄 수 있다.

휴식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전 대표가 11일 오후 인천공항에서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눈물을 흘리며 노회찬 의원의 빈소를 찾은 수많은 사람들은 과연 ‘자살 미화’를 당한 것(?)일까? 노회찬 의원은 드루킹들로부터 불법적인 자금을 받은 사실을 인정했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여느 정치인과 사뭇 다른 반응이 나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이 일이 오히려 다른 정치인에 비해 상대적 도덕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노회찬 의원 본인이 서민과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정치를 위해 노력해왔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회찬 의원 조문 열풍(?)에 굳이 문제의식을 가진다면 그것은 ‘자살 미화’에 대한 것일 수 없다. 첫째는 일반 유권자들이 광범위하게 갖고 있는 정치혐오의 기원이 무엇이냐 이고 둘째는 왜 다른 정치인들은 서민과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느냐이다.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기성정치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반성을 요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홍준표 전 대표가 해야 할 일은 자살 미화 걱정이 아니라 반성인 것이다.

자유한국당식의 보수정치는 그들이 편의적으로 상정한 ‘좌파’의 의도를 의심하는 걸 존재 이유로 해왔다. 북한과 좌파들이 이러저러한 속임수를 쓰고 음모를 꾸미고 있으니 이를 제압하기 위해선 다소간의 초법적 행위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계엄령 문건에 대한 이들의 태도도 같은 관점으로 볼 수 있다. 국정원이나 기무사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민간인을 사찰하고 인터넷 여론에 개입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런 보수정치의 기만적 시도가 효과가 없는 건 아니라는 거다. 보수정치가 늘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정치가 오직 유권자를 속이고 자신들의 사익을 관철하는 것에만 혈안이 돼있다는 정치혐오적 세계관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 위력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노회찬 의원에 대한 추모 열기에 대해서도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게 잘한 일이냐”는 식의 비난이 인터넷 공간에서 표출되는 게 현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건 잘못됐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고인의 삶을 기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설득하면서 정치자금법 개정과 같은 논의를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결국 좋다는 거냐, 나쁘다는 거냐”라고 되묻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속아 넘어가지 말자’는 결의를 정치적 태도로 나타낸 것이라는 점에서 앞서 논한 정치혐오의 또 다른 버전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정치인의 노선이나 주장을 평가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유권자를 속이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한 수많은 판단기준을 들이미는 것에 익숙하다. 이런 기준을 모두 통과한 사람은 ‘진정한 정치인’이 되어 추앙의 대상이 된다. 이런 태도는 종종 정치가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는데, 동시에 실패한 정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한다.

진보정치는 오랫동안 기성정치에 비해 깨끗하고 능력 있다는 점과 ‘가난한 사람을 대변하겠다’는 의지로 평가받아왔다. 최근에 여러 조직적 혼란을 거치면서 후자보다는 전자에 방점이 찍히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진보정치는 깨끗하고 유능해야 한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식의 정치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결국 후자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홍준표 전 대표의 모욕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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