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가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그걸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원내 유일 진보정당의 몇 안 되는 국회의원 중 한 사람이, 그 당의 현직 원내대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노회찬이기에 이 소식이 더더욱 믿기지 않는다.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며 사는 사람으로서 이 일을 앞에 두고 객관적이 될 수 없다. 미워했지만 미워할 수 없었고, 사랑한 적이 없는데 사랑을 후회했다. 이제 가는 길이 다르다고 했으나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저 부정이 부끄러워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세간의 해석을 내심 믿지 못한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그가 정말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정치인이라는 게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의 빈소를 찾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 이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하는 권력자들의 화환이 전동휠체어를 타고 온 장애인들의 병풍이 되었다. 해고노동자로 오래 지냈던 KTX 승무원들과 민주노총 전현직 위원장, 여야의 대표 및 원내대표들, 이런 저런 장관들, 국정원장, 심지어 공안검사 출신으로 계엄령 선포를 검토하던 정부의 권한대행을 지낸 사람이 한 곳에 섰다. 노회찬과 같은 사람이 아니면 가능했겠는가.

오늘날의 사람들은 죽음에 너그럽다. 아니, 너그럽다기 보다는 죽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사람을 믿는다. 그것조차 견디지 못하는 세력도 있다. 지금이야 고인의 삶을 칭송하는데 말을 보태지만, 곧 스타 진보정치인이 받은 부정한 돈이 더 있을 것이라거나 정치브로커의 마수가 이 정부와 진보정치 일반에 훨씬 더 깊게 뿌리 내려 있었다거나 하는 악선동이 이어질지 모른다. 무슨 신문의 논설위원입네 하는 자들은 고인의 유지를 아전인수하며 제멋대로 글을 써 제낄 것이다. 진보정치는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가, 또 떠오를 것이다. 그것이 무쇠를 달구는 뜨거운 불과 내려치는 망치가 될지, 아니면 바위를 쪼개는 날카로운 정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언론은 촌철살인의 정치인으로 그를 묘사한다. 노동자와 서민의 삶에 진지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던, 진보정치의 원칙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유연했던, 그리고 사람을 설득하는 것만큼이나 문필과 기악에 조예가 깊었던 이. 이런 능력이야말로 정치인 노회찬의 최대 자산이었다. 이 덕에 국민들은 그를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성공한 정치인 이전 고인의 생을 돌아보는 게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운동가 노회찬에 대한 언론의 서술은 짤막하다. 인민노련 활동을 했고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의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런 저런’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고난과 굴욕의 연속이었을 거고 운동가로서 의지를 시험하는 순간이 매일 매일 닥쳤을 것이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빈소 (연합뉴스)

1980년대 초반부터 언젠가 도래할 혁명을 꿈꾸며 노동운동에 매진했던 고인은 198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체포돼 1992년까지 옥살이를 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조직은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이라는 혁명적인 정당을 만들기로 했다. 이 흐름을 주도한 인민노련의 또 다른 활동가 주대환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와 소련의 붕괴를 근거로 합법정당 노선을 주장해 이론적 갈등의 한복판에 섰다. 1992년 한국노동당 창준위라는 형태로 주대환의 노선이 관철되었으나 발기인대회 직전 지도부가 구속됐다. 지도부를 잃은 조직은 당시 1987년 대선에서 양김분열에 실망한 이른바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출신들이 함께 만든 민중당과 마치 흡수되듯 통합을 했다.

현실적인 동시에 절충적 시도였던 민중당은 1992년 3월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해 등록이 취소됐다. 지도부를 맡았던 명망가들은 떠나버렸다. 이재오와 김문수는 이렇게 떠난 이들의 대명사로 남았다. 남은 이들이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를 만들어 진보정치의 명맥을 이어가기로 했으나 합법정당을 다시 만들 역량이 안 돼 ‘준정당적 조직’을 표방했다. 만기출소한 노회찬은 이 조직의 사무총장을 맡았다.

1992년 대선은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이라는 3파전 구도로 치러졌지만 진정추를 비롯해 이런 저런 운동권 조직들은 1987년 대선에 출마했다가 사퇴한 백기완 후보를 민중후보로 출마시켰다. 노회찬도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을 했다. 당시 백기완 후보가 얻은 표는 23만표, 전체 유권자의 1% 정도 수준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떠났지만 노회찬은 진정추를 계속 책임져야 했다.

이 다음부터 진보정당의 명맥을 잇는 역사의 서술은 지리멸렬 그 자체이다. 진정추, 민중회의, 사회당추진위, 전국노동운동연합이 다시 진보정당추진위 결성을 위한 수임위를 구성했지만 1993년 3월 합의에 이르지 못해 해소됐다. 같은 해 5월 민중회의와 사추위가 통합해 민중정치연합(민정련)을 결성했고 독자적 창당을 추진했지만 여전히 창당은 어려웠다. 1995년이 되자 민정련과 진정추 사이에 통합 논의가 일어났다. 여기서 민감한 문제가 생겼다. 노회찬이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서 배제된 이들이 만든 통합민주당으로 출마를 시도했다가 사면복권이 되지 않은 문제로 무산된 것이다.

이 대목은 아직까지 고인의 정치 이력을 놓고 운동권들끼리 입씨름을 벌이는 소재 중 하나이다. 이렇게 된 마당에 이걸 두고 옳으니 그르니 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고인의 심정을 이해해볼 필요는 있다. 초창기 그나마 조직을 유지할 수는 있는 수준이었던 진정추는 활동가들이 제도권 정당 또는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등의 시민단체로 옮겨가거나 아예 운동을 청산하면서 지속적으로 위축되고 있었다. 학생운동 역시 군부독재 청산과 소련 붕괴 이후 표류하고 있어 이른바 ‘재생산’도 쉽지는 않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진정추의 상근 간부였던 이의 증언이 정영태 인하대 교수의 책 <파벌>에 나와 있다. 그에 따르면 민정련의 남은 상근자는 단 3명이었고 진정추에는 자신 하나만이 남았을 정도였다. 상근비를 제대로 주었을리도 없지만, 그조차도 유지는 매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런 대목도 있다. “노회찬씨가 (진보정치연합) 대표였는데 … 사표를 저한테 제출했습니다. 사표를 반려할 수는 없고 해서, 그럼 나도 사표를 낸다고 했고, 사표가 자동으로 반려된 거죠.”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1996년 말 국회에서 노동법이 날치기 통과되고, 반발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대규모로 일어나고, 이에 고무된 사회운동단체들이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1997년 대선 후보로 출마시키기로 하면서 진보정당 재건의 가능성은 다시 열렸다. 거의 포기 직전까지 갔던 고인의 진보정당을 향한 꿈은 기사회생했다. 수면 아래서 꿈틀대던 불온한(?) 기운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8%를 넘는 정당득표를 기록하고 마침내 2004년 10명의 국회의원 당선자를 배출하며 그야말로 절정에 달했다. 세상을 바꾼다는 꿈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대중정치인 노회찬은 이런 과정을 거치고서야 탄생할 수 있었다.

2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빈소에서 시민들이 조문을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돌이켜보면 운동가로서 그가 경험하며 또 지켰던 것들이 있었기에 촌철살인이니 풍자니 해학이니 하는 면모도 돋보일 수 있었을 거다. 노회찬이라는 정치인을 단지 말 잘하는 사람으로 기억할 수 없는 이유다. 그야말로 뿌리가 깊은 나무였고, 거목이었다. 절대 쓰러지지 않을 거대한 줄기가 있었기에 우리 같은 어설픈 진보주의자들이 마음껏 찧고 까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떠난 후 진보의 시계는 멈춰버리고 우리 모두가 복잡한 감정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를 완전히 떠나보내면 역사의 수레바퀴도 다시 돌아가기 시작할테지만, 우리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시간대를 살아야 한다. 그것은 노회찬이 없는 시대이다. 이제 진보정치는 노회찬도 없이, 이 야만의 시대를 헤쳐 나가야 한다. 누가 동지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무엇이 진실인지도 판단하기 어렵다. 이 암흑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아마 운동가 노회찬도 한 때는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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