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이달 개최된 제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들을 엮은 리뷰입니다. 여름을 맞아 ‘호러·스릴러 장르 속 여성성’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스릴러 중에서도 ‘한 인물이 한 공간에 갇혀 벌어지는 폐소 스릴러’에 집중했습니다. 소개해 드릴 작품은 오인천 감독의 <데스트랩>과 다니엘레 미시스키아 감독의 <디 엔드?>, 그리고 로드리고 코르테스 감독의 <베리드>입니다.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디어스=도우리 객원기자] 작품 하나. 영화 <데스트랩>에서 한 형사가 탈옥한 연쇄살인마를 쫓다 DMZ에 들어서서 지뢰를 밟는다. 작품 둘. 영화 <디 엔드?>에서는 한 사내가 엘리베이터에 갇혀 좀비와 사투를 벌인다. 두 작품 모두 한정된 공간에 갇혀 사투를 벌인다는 점에서 일종의 ‘폐소 스릴러’다. 물론 전자의 공간은 사방이 개방돼 엄밀히 말해 ‘폐소’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뢰를 밟은 채 옴짝달싹 움직이지 못한다는 점, DMZ가 제한구역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갇힌’ 상태다.

오인천 감독의 <데스트랩>

폐소 스릴러는 ‘폐소 공포증’을 자극한다. 폐소 공포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한 불안으로, 일종의 마비 상태다. 그리고 훌륭한 폐소 스릴러는 물리적 폐소뿐 아니라 주인공의 사회적 관계들을 단절해 나가며 ‘심리적 폐소’를 조성한다. 따라서 폐소 스릴러의 공포 양상은 주인공의 신분과 정체성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여성이 주인공인 <데스트랩>을 통해 ‘여성성’에 대한 메타포를 읽어낼 수 있다. 이를 남성이 주인공인 <디 엔드?>, <베리드>와 비교해 읽으면 더욱 선명해진다.

2010년에 개봉돼 많은 호평을 받은 <베리드>는 대표적인 폐소 스릴러로 꼽을 수 있다. <베리드>는 트럭 운전사인 폴 콘로이(라이언 레이놀즈)가 이라크 근무 중 습격을 받은 뒤, 관에 갇혀 땅속에 생매장된 신세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폴의 신분은 극의 스릴을 이끈다. 주인공 폴이 인질 담당자에게 일갈했듯, “내가 당신 상사였거나 높은 신분이었다면 바로 꺼내 주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폴의 탈출 요청이 번번이 좌절되고 지연되는 것은 그가 그저 ‘트럭 운전사’인 탓이다. 그가 아내와 두 아이가 있는 가장이라는 설정도 삶을 붙잡는 희망인 동시에 협박의 조건이라는 점에서 절망이 된다.

<데스트랩>의 주인공 권민(주민하)과 <디 엔드?>의 주인공 클라우디오(알레산드로 로자)가 각각 여성, 남성이라는 점도 스릴의 양상을 좌우한다. 우선 구조 요청에 대한 수신자의 ‘신뢰도’가 다르다. 권민 형사의 ‘DMZ에서 지뢰에 밟혔다’라는 호소는 좀처럼 먹히지 않는 반면, 클라우디오의 요청은 대부분 곧바로 수용된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목소리는 서비스와 친절의 상징이지만, 남성의 목소리보다 신뢰를 덜 받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의 목소리가 ‘약자의 목소리’인 탓인데, <베리드>에서 폴의 구조 요청이 잘 진척되지 않은 것도 그가 ‘트럭 운전사’라는 하층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클라우디오는 대기업 임원으로서 직원들에게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보이스피싱 수법이 ‘검사’나 ‘경찰’의 신분을 들먹이는, 중저음의 남성 목소리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권민 형사가 남성이었다면 보다 구조 요청이 빠르게 수용됐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권민 형사에게 쥐어진 무기는 공포탄, 클라우디오에게 건네진 무기는 모두 실탄이 든 권총, 장총이라는 점도 꽤 상징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통화 중 유일하게 권민 형사의 구조 요청을 믿은(원한을 품고 있음에도) 자는 여성이라는 것이다. 이는 ‘여성의 목소리는 같은 여성만이 잘 알아챌 수 있다’는 메타포로도 읽힌다.

또 <디 엔드?>의 클라우디오에게는 ‘아내’가 있다. 이는 <베리드>의 폴처럼 희망의 끈이자 아킬레스건이다. 하지만 <데스트랩>의 권민 형사에게는 남자친구나, 남편의 존재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났다면? 스릴의 재미가 반감됐을 것이다. 여성에게 남자친구나 남편의 존재는 보호자이자 상황에 맞설 강력한 대리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가족 스릴러 <사탄의 숭배자>만 봐도 그렇다. 남성 가장이 잠시 여행을 감으로써 나머지 식구가 기이한 일들을 감당하며 공포가 배가되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약자)의 위험은 남성 보호자(가장)의 유무에 따라 좌우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니엘레 미시스키아 감독의 <디 엔드?> 장면

상상을 좀 더 밀고 나가보자. <데스트랩>에서 다른 설정은 모두 같게 두고, 주인공이 여형사가 아닌 남형사였다면 어땠을까. 관객은 남형사 특유의 ‘마초성’이 크게 발휘되지 못하고 기다림과 협상을 반복하는 모습에 지루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번에는 <디 엔드?>의 클라우디오가 여성이었다면 어땠을까. 여성 대기업 임원이 엘리베이터에 갇혀 좀비로 분한 내연남을 죽이고, 말미에 남직원 좀비를 짓밟는다면? 우선 관객들은 여성이 임원이라던가 내연남이 있다는 설정을 유의할 것이다. 무엇보다 ‘여성’의 폭력성과 대범함에 잘 납득하지 못할 것이므로 추가적인 설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좀비물’이라는 스릴 자체에 온전히 초점이 맞춰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들은 여전히 대화와 협상은 여성의 언어, 폭력성은 남성의 언어라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는 <데스트랩>과 <디 엔드?>, 그리고 <베리드>를 통해, 여성에게 적용되는 ‘사회적 폐소’가 더 견고함을 알 수 있다.

<데스트랩>의 권민 형사가 남성적 공간으로 상징되어 온 DMZ에 들어선 것처럼, 여성들은 최근 들어서야 정치인이나 기업 임원 등 남성적 공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권민 형사에게 그랬듯, 그 공간은 여성에게 온통 지뢰밭이다. 성폭력이나 경력 단절, 임금 차별과 같은 일들에 발목을 자주 붙잡힌다. 이에 대한 호소도 좀처럼 신뢰받기 어렵다. DMZ는 최근 남북 정상회담이 성공리에 개최되며 ‘평화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평등의 공간’이 되기까지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앞으로 여성들이 ‘사회적 폐소’로부터 해소되어 운신의 폭이 더 넓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면 더 새롭고 매력적인 ‘폐소 스릴러’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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