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사 계엄령 문건은 단순한 가상 시나리오로 보기 어려워졌다. 탄핵 기각 후 군대를 동원해 촛불시민을 진압하고, 국회의 계엄령 해제를 막기 위해 야당 국회의원들을 검거하는 동시에 언론사들을 장악해 여론을 통제하려고 했던 매우 구체적이고, 실행적인 계획이었음이 드러났다. 20일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이 발표한 내용은 기무사 문건의 실체는 충격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분노와 공포의 군사 쿠데타 시나리오로 볼 수밖에 없는 상항이다.

그런 이유로는 첫째, 장악한 언론사들을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등 계획이 너무도 디테일하고 둘째, 1979년 쿠데타 상황을 참고한 정황이 드러났고, 셋째, 2년마다 합참에서 수립하는 통상적인 ‘계엄실무편람’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 등이다. 시민들이 80년 광주의 비극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또 벌어질 뻔 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또 분노하는 것도 전혀 과하지 않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20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계엄령 문건'의 세부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청와대는 국방부에서 취합된 '계엄령 문건'을 19일 제출받아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이날 일부 자료를 공개한 것이다. ⓒ연합뉴스

당시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회의 계엄령 해제 결의를 막기 위해서 국회의원들을 잡아 가두려고 했다는 것이 기무사의 계엄령 문건이 단순히 참고용이라고 볼 수 없는 결정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군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각 언론사를 장악해 비판적 보도를 원천봉쇄할 계획까지 수립해 두었다. 물론 가장 큰 목표는 광화문광장의 촛불시민들을 진압하고, 해산하는 것에 있다. 이를 위해 광화문과 여의도에 기계화사단, 기갑여단, 특전사 등 우리 군의 최정예들을 투입할 계획이었다.

이 모든 계획의 전제 조건은 바로 ‘탄핵 기각’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입을 모으는 것도 요즘 시민들의 모습이다. 당시 헌법재판소가 올바른 판단을 한 것이 정말로 다행한 일이고, 칭찬을 아낄 필요 없지만 헌재의 판단에 다른 요소가 개입할 수 없게 만든 것은 역시나 한겨울을 통째로 거리에서 보낸 수천만 촛불시민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춥다고 모두가 광장에 나오지 않았다면,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됐다고 촛불이 꺼졌다면, 그런 잠시의 방심은 또 어떤 언론의 왜곡과 호도의 빌미가 됐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뜨거운 열망을 평화에 담지 못하고 폭력시위가 됐다면 지금 누리는 평화는 우리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탄핵이 인용됐다는 것이 기무사 계엄령 계획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겠지만, 그 이전에 촛불시민들의 철저한 평화집회 유지가 결국에는 강제해산의 명분과 이유를 주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2017년 3월 4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주최로 열린 '19차 범국민행동의 날' 촛불집회에서 참석자들이 퇴진을 상징하는 레드카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역사상 가장 뜨거운 분노를 가장 평화롭고 침착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외쳤던 그 겨울의 촛불시민의 위대함이 새삼 가슴에 사무친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분노하고도 거칠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와 생각해봐도 가히 믿기지 않고, 실감도 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이 거짓말만 같았는데, 그 성숙한 민주시민의 정렬된 대오가 결국엔 국정농단으로부터 나라를 구했고, 기무사 등의 쿠데타 의지도 꺾어 또 다시 나라를 구했다.

그러나 거꾸로 본다면 그런 평화로운 촛불시민들을 탱크와 특전사로, 과거 광주에서 벌어졌던 유혈참극을 다시 계획했다는 사실에 치 떨리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우리는 이미 두 번의 쿠데타 역사를 깊은 상처로 안고 있다. 그때와 세상이 달라졌고, 시민 의식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지만 군대는, 민주주의를 짓밟으려는 일부 정치군인들은 아직도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국방농단을 처단해야 할 때이다. 다시는 군의 정치개입이 거론조차 되지 않도록 완벽한 청산이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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