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동이의 앞길을 가로막던 악역 중 한 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인 세력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으며 조정을 좌지우지했던 전 좌상, 오태석이 자신이 불리해지자 버린 장희빈에 의해 뒤통수를 맞은 것이죠. 드라마가 시작할 때부터 등장했던 비중 있는 역할로 수많은 음모와 악행에 개입했던 인물이 죽음으로 하차하면서 동이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극의 전체 구도가 동이 대 장희빈의 1대 1 대결로 좀 더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될 거에요.

그런데, 악역이 스스로가 저지른 악행에 의해 처벌받고 피투성이가 되어 방바닥을 굴러도 의당 느껴져야 할 통쾌함이나 개운함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과정이 동이와 검계를 또 다시 위기로 몰아넣을 함정으로 사용되었고, 이미 오태석이 가진 힘과 세력이 별 볼일 없는 것이었기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악인이 하나 사라졌다고 좋아하기엔 동이에게 또 다시 닥쳐온 위기의 크기가 그리 만만한 것도 아니고, 그의 죽음으로 장희빈 세력은 아슬아슬하던 위기에서 벗어나 도리어 홀가분해 졌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처음부터 극의 흐름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인 거물 악역이 이렇게 초라하고 별 감흥 없이 퇴장한다는 것은 지금 드라마 동이가 처해있는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매번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고 동이는 후궁의 신분을 망각한 체 여전히 좌충우돌 활약하고 있지만, 정작 드라마는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하고 질질 늘어지고만 있거든요. 이런 상태에선 누가 죽는다 해도, 어떤 사건이 벌어진다 해도 별다른 흥미나 관심을 끌지 못하고 그냥 흘러갈 뿐 일거에요.

가장 강력한 적이 되어야 할 장희빈이 풍기던 포스는 일찌감치 소멸해 버렸고, 동이 역시도 일개 천민에서 후궁의 신분으로 상승하는 성공의 쾌감을 맛보았습니다. 전체 구도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키인 동이를 향한 숙종의 마음은 흔들릴 줄 모릅니다. 그러니 끝까지 경쟁하며 긴장을 유지하게 해 주어야할 강대한 적이 사라진 지금 동이가 상대해야 하는 가장 위협적이고 무서운 적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이 가진 약점, 신분의 한계와 검계와의 과거뿐이에요. 아무리 검계다 세자 교체다 하는 곁가지 사건들이 이어진다 해도 동이가 취할 수 있는 길은 한정되어 있고 그 결말이 뻔히 보이는 단순한 곳으로만 향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만 불행히도 이런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서 극의 전면에 불러 왔지만 이것은 너무나 오래전의 기억입니다. 극의 극 초반에 있었던 일을 억지로 지금 불러오다 보니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우습기 짝이 없는 배경 설명과 회상 장면들을 점점 더 덧붙여야 하고 가뜩이나 늘어지는 극의 속도는 점점 더 떨어져 버렸죠. 게둬라의 입을 통해 신분제 사회의 절망과 괴로움을 외치며 짐짓 진지한 주제를 꺼내는 것처럼 말하지만 이런 접근은 동이라는 개인의 단순한 성공 스토리에서 다루기엔 너무 무겁고 생뚱맞은 것이었구요. 그나마도 이런 사회적 문제와 한계의 해결을 착한 나라님 숙종의 성품에 의지하고, 그 이유 역시도 개인적인 복수와 원한의 해소로 단순화시켜버리면서 검계만 우스워져 버렸어요. 사람 위에 사람 있는 세상에 절망하며 일어난 이들은 그저 자신들의 원한을 갚기 위해 양반을 학살했던 폭력집단으로 전락하며 또 다시 소탕되어 버렸습니다. 이래서야 왜 굳이 검계를 재건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동이는 애초에 끝났어야 하는 드라마란 말입니다. 장희빈이 권력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져 버리고 남인들이 몰락해서 귀양을 떠나고, 동이가 인현왕후를 복권시킨 뒤 스스로도 후궁의 자리를 차지했던, 그 관계 역전의 해피엔딩 단계에서 깔끔하게 마무리되어야 했어요. 구태여 초기 검계의 원한을 다시 끌어내어 오태석을 주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젠 별 다른 힘도 매력도 느껴지지 않는 장희빈의 죽음과 함께 마무리되었어야 하는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제작진이 연장을 결정한 것을 보니 동이는 지금보다도 점점 늘어지는 엿가락 드라마의 운명을 따라가겠네요. 자이언트에게 결국 선두자리를 내준 이유는 경쟁작의 뛰어난 흡입력 이전에 스스로 망해버린 실책 때문이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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