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후퇴하고 있는 것일까? 이 의문을 더해주는 하나의 사례가 또 추가됐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 재정개혁특위가 권고한 세제개편안에 기획재정부가 사실상 노골적인 반대의사를 표시하고 청와대가 이를 재확인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단 문제가 된 것은 재정개혁특위가 금융소득 과세 기준을 강화하라고 한 부분이다. 재정개혁특위의 권고안에는 연간금융소득 중 2천만원 초과분을 종합소득세 과세표준에 가산하게 돼있는 현행 제도의 기준을 1천만원 초과로 변경하는 안이 포함돼있다. 현재 기준으로 하면 적용대상자는 9만 여 명이지만 과세 기준을 강화하면 40만 여 명으로 늘어난다.

이와 같은 내용은 3일 청와대에 보고되고 4일 공개됐는데, 기재부의 반발은 거의 동시에 나왔다. 기재부의 논리는 금융소득 또는 임대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중산층 은퇴자들일 가능성이 높고 종합소득세를 근거로 산출되는 건강보험료 부담까지 늘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금융을 떠난 자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쏠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역시 연간 2천만원 수준인 임대소득 과세 기준과의 형평성 문제라는 근거가 따라 붙었다.

이에 대해 재정개혁특위는 연간금융소득을 1천만원 이상 올리는 사람들은 고액자산가들로 봐야 하고 그중에서도 근로소득이나 사업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지 않는 경우는 타격이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반론을 내놨다. 또 과세 기준 강화로 인한 세금 인상분이 부동산 시장 쏠림 현상으로 이어지기에는 미미한 수준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논란이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5일 청와대는 재정개혁특위는 자문기구에 불과하다며 기재부와 청와대의 입장이 같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재정개혁특위원들은 상당한 당혹감을 표시하고 있다고 한다. 모처럼 만든 권고안이 공개 하루 만에 완전히 효력을 상실한 상태가 된데다 앞으로의 권고안에도 힘이 실리지 않게 돼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부터 짚어보자. 재정개혁특위가 민감한 내용을 의견수렴 없이 발표했다는 지적이 있다. 또 재정개혁특위 내에 금융전문가가 없어서 결과적으로 설익은 안을 내놓게 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을 검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쨌든 ‘기술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걸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만일 그런 수준의 문제라면 이 사태는 ‘해프닝’으로 기록돼야 할 것이다.

문제는 지방선거를 전후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이 상황을 일회적이고 우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증세, 복지제도 확충, 사회적 대화 틀의 실질적 형성을 위한 노동계와의 관계 개선 등 개혁을 위한 정책들은 표류하고 있다.

재정개혁특위가 권고한 종부세 개편안의 경우도 “세금폭탄이 아니라 콩알탄 수준”이란 혹평을 받고 있다. 기재부는 이 대목에서도 공정시장가액비율을 현행 80% 수준으로 유지하고 세율도 일부만 인상하자는 소수의견을 첨부한 상태다. 조세 저항 등 정치적 논란을 만들지 않기 위한 행동일까? 그런데 종부세 개편안은 ‘콩알탄 수준’으로 국회에 제출돼도 그대로 통과되기 쉽지 않다. 보수야당이 ‘세금폭탄론’을 포기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힘을 더 빼버린 상태로 국회로 넘긴다고 상황이 크게 다를까 의문이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3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열린 차담회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한겨레와 진행한 인터뷰는 최근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따로 있을 수 있다는 느낌을 준다. 김상조 위원장은 “시민사회의 문제의식 속에 내재된 근본주의적 성향에 대한 점검 반성이 없이는 어떤 정부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면서 “과거 보수정부를 비판할 때와 같은 시각으로 현 정부를 평가하고 비판하면 어느 정부도 성공하기 어렵다”고 했다. 비판을 ‘발목잡기’로 보는 전형적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김상조 위원장의 발언은 최근 인터넷전문은행 등을 둘러싼 규제완화 등 문제를 겨냥한 걸로 보인다. 정부는 혁신성장의 필요성 등을 근거로 규제완화 문제의 실질적 진전을 주문하고 있는데 최근 참여연대가 이를 비판하면서 긴장관계가 형성됐다. 특히 보수언론은 문재인 대통령이 규제혁신점검회의를 취소한 사례를 들어 “참여연대가 규제완화에 반대해서 취소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한 바 있다. 청와대 관계자 등은 이러한 해석은 사실이 아니고 오히려 규제완화와 관련한 정부의 준비 태도가 미진한 게 이유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문재인 정권이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와 관료들 사이에서 무력화 되고 있다는 인식이다. 사실 그런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주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시민사회의 비판 속에 관료마저 복지부동을 유지하면 정부 입장에선 정책 집행의 수단이 상실된다. 따라서 관료의 요구는 수용하고 시민사회의 반발은 시민사회 출신 인사가 직접 나서서 통제하는, 나름대로의 채찍과 당근을 동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경제수석 교체와 경제부총리 위상 강화, 청와대 정책실장의 퇴조 분위기 역시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좀 더 장기적인 로드맵이 영향을 미치는 상황일 수도 있다. 더불어민주당 차기 당 대표 출마 가능성이 점쳐지는 이해찬 의원이 지난 대선 기간 했다는 말을 상기해보자. 이해찬 의원은 극우보수를 완전히 궤멸시켜야 하고 20년 이상 장기집권을 꿈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재를 하지 않는 이상 극우보수를 물리적으로 궤멸시킬 수는 없으니, 지지기반을 잠식해 주류를 교체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기성의 문법으로 말하자면 결국 이는 ‘중도화’ 프레임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유권자층의 비판을 초래하더라도 중도적 유권자층의 지지를 명확히 하겠다는 거다. 이를 통해 본다면 왜 압승이 예상됐고 또 실제로 압승을 거둔 지방선거를 전후해 정책적 후퇴를 우려할만한 일들이 정부여당을 진원지로 해서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당장 개혁의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우니 현재의 우위를 영구적 수준까지 만드는 걸 우선시 하겠다는 분위기가 정권 내부에 만연해있는 것 아닐까 한다.

요즘 분위기를 보면 더불어민주당의 장기집권이 가능한 상황이 될 것도 같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 차원에서 뭘 의미하는지를 더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유럽 사민주의 세력의 집권 이후 행태는 전형적인 중도화였다. 성공적인 주류화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은 일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극우포퓰리즘의 인큐베이터가 됐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됐다.

한국의 상황이 크게 다를까? 새롭고 신선한 젊은 정치인이 등장해 암호화폐 거래 자유화, 수능 정시 대폭 확대, 난민 퇴출, 주식시장에서의 공매도 전면 금지, 사법시험 부활, 세금 감면 등을 공격적으로 내세우며 ‘개혁’을 부르짖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이런 일은 근대 정치의 전반에서 반복되고 있다. 21세기 극우포퓰리즘에서 우파는 ‘개혁’의 외피를 두르고 부활한다.

이런 일을 방지하려면 개혁의 주도권을 놓지 말아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다. 집권세력이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책임을 실제적 대안을 꿈꾸고 자처하는 세력이 적극적으로 짊어져야 한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정권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만들고 있다. 미래의 극우주의자 역시도 똑같은 광경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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