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과 가족을 등지고 래퍼의 꿈을 안고 상경한 학수(박정민)는 실력은 있지만 6년째 <쇼미더머니> 예선탈락을 면치 못한 비운의 무명 래퍼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연락을 끊고 살았던 아버지(장항선)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변산으로 달려간 학수는 그곳에서 잊고 싶었던 과거, 사람들을 하나둘씩 만나고 곤경에 처한다.

<동주>(2016), <박열>(2017)을 연이어 성공시킨 이준익 감독의 신작 <변산>(2018)은 피하고 싶은 과거와 마주하게 된 한 남자의 성장담을 다룬 영화다. 고향, 가족, 친구와 얽힌 악연에서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게 된 남자는, 그와 달리 현실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소기의 성과를 거둔 여성 선미(김고은)의 도움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낸다.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의 청춘들은 조국을 침략한 일제의 폭압에 맞서 싸웠고, 21세기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 청춘들은 청년 실업, 헬조선과 같은 불투명한 잿빛 미래와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 홍대 클럽에서 심빡으로 통하는 학수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곤 불운한 가정사 밖에 없는 ‘노오력’의 대명사이다. 온갖 알바를 섭렵하며 래퍼의 꿈을 근근이 이어가는 학수는 열정과 노력만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현실에 낙담하고 잠시 고향에 내려가지만, 그곳 역시 답답하고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다.

과거 병든 어머니와 학수를 뒤로 하고 외도와 노름을 일삼았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되어 학수 앞에 나타났고, 그 뒤를 이어 학수 앞에 나타나는 사람들 또한 학수에게 썩 유쾌한 기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우리는 과거를 잊지만,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는 <매그놀리아>(2000)의 대사처럼, 가뜩이나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학수에게 연거푸 찾아오는 과거의 악몽들은 그를 더욱 지치게 만든다.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이 있듯이, <변산>이 택한 위기탈출 방법은 정공법이다. 과거를 피하기 급급해하던 학수가 자신을 괴롭히는 악연들에게 강펀치를 날리는 변화된 모습은 이준익 감독이 현 시대 청춘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처럼 보인다. 극중 주인공들이 오랜 묵은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도 독특하게 풀어낸다. 가령, 자식에게 부정적인 유산을 남긴 아버지와 아들이 화해할 수 있을까 라는 어려운 질문들 두고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은 오랜 망설임 끝에 부정적인 답변을 내놨지만, <변산>의 아버지는 자식의 주먹에 기꺼이 자신의 얼굴을 내놓으며 극적인 화해를 꾀한다.

케케묵은 신파극 대신 정면 돌파를 선택한 영화는 다소 무겁게 다가올 수 있는 극적 설정과 장면에서도 능청스러운 유쾌함을 보여주고 있지만, 연출기법이나 극중 인물 간 관계, 갈등 설정에 있어 작위적이고 과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휴먼 드라마를 지향하는 한국 상업영화들이 흔히 범하는 우이기는 하다. 하지만, <소원>(2013), <사도>(2014), <동주>, <박열>에서 오버스러운 설정 없이 깔끔하고 정갈한 연출로 호평 받았던 이준익 감독의 전작과 비교했을 때, 인물들 간의 갈등과 화해를 극대화하기 위한 <변산>의 올드한 설정과 마당극과 같은 소동극은 영화의 완성도를 아쉽게 한다. 극중 김고은이 분한 ‘똑소리 나는 엄친딸’ 선미 또한, 여타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에 비해선 비교적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만, 남성 주인공과 동등한 파트너로 각인된 <박열>의 후미코(최희서)가 보여준 주체적 활약상엔 미치지 못한다.

영화 <변산> 스틸 이미지

그나마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학수 역을 맡은 박정민의 열연이다. <파수꾼>(2010)의 성공 이후 독립, 상업영화, 드라마를 꾸준히 오가며 한국영화 뉴페이스로 자리 잡은 박정민은 이준익 감독의 <변산> 원톱 주연으로 참여하며 한국영화 최고 기대주로서 자신이 가진 역량을 재확인시켰다. 2007년 단편영화 <세상의 끝>으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한번도 연기활동을 쉬어본 적이 없는 박정민은 <쇼미더머니> 6년 개근에 빛나는 성실과 끈기의 아이콘 김학수 그 자체다. <변산>은 무명 래퍼 학수 역을 맡기 위해 유명 래퍼 얀키와 함께 1년 동안 랩을 연습하고 직접 랩 가사를 쓰는 경지에 오를 정도로 캐릭터에 대한 몰입과 애정을 보여준 배우 박정민의 향후 활동을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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