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전혁수 기자] 자유한국당이 '개헌'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개헌을 말하기에 앞서 선거제도 개혁을 논의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자유한국당이 주장하는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 등의 권력구조 개편과 현행 소선거구제가 어울리지 않는 데다, 지난 지방선거 동시개헌 무산의 원죄가 자유한국당에 있기 때문이다.

3일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개헌 의지가 있다면 국회에서 국민개헌안을 마련해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대합의를 이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원내대표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라든지 본질적 문제를 제대로 건드리려면 영장청구권 문제 등 개헌 관련 사항이 많다"며 "제왕적 대통령 권력에서 비롯된 총체적 문제도 개헌을 통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연합뉴스)

김성태 원내대표는 "지금은 정략적이고 정치적인 입장이 배제된 시기"라며 "지난번에 방점을 찍지 못한 몇 가지 사안에만 접근을 이뤄내면 개헌을 이뤄낼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여건"이라고 강조했다. 김 원내대표는 전날에도 "국민개헌을 추진해 나가야 할 판에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이 묵묵부답으로 침묵을 지키는 것이 혹시라도 개헌을 하지 않으려는 속내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고 비판한 바 있다.

바른미래당도 개헌 이슈 불붙이기에 한창이다. 김동철 바른미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하반기 국회에서 민생개혁입법을 추진하는 일도 시급하지만 무엇보다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에 속도를 내서 올해 안에는 완성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김 위원장은 민주당을 향해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에 찬성인지 반대인지 국민 앞에 분명한 입장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보수야당의 주장대로 개헌은 반드시 필요한 과제다. 1987년 헌법 체제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의 변화상 등을 적용하기 위해서라도 개헌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보수야당의 주장은 문제의 본질을 빗겨가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의원내각제에 가까운 분권형 대통령제를 주장하고 있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의회로 상당부분 흡수해 권력의 집중을 막겠다는 취지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수차례 경험한 한국에서 충분히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제안이다.

문제는 이 같은 권력구조 형태를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는 기반이 갖춰져 있는지 여부다. 분권형 대통령제를 실시하려면 의회의 권력이 강해지는 만큼, 국민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는 의회의 구성 여부가 관건이다. 자칫 특정 정당이 독주할 경우 의회독재의 우려도 크기 때문에 적정한 수준의 다당제를 구성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다. 소선거구제는 1등만 당선되는 전형적인 승자독식 선거제도다. 1등이 아닌 후보자를 선택한 유권자의 표는 '사표'가 된다. 만약 51대49의 투표 결과가 나왔다면, 49%의 국민의 의사는 그대로 사장되는 셈이다. 국민의 의사가 선거에 온전히 반영되지 않는단 얘기다.

소선거구제는 결국 국민들의 사표심리를 자극해 거대정당에 투표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불러온다. 유권자는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거대정당에 속하지 않은 후보라면, 최선이 아닌 차악을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소수정당의 의회 진입을 막고 거대양당제로의 정당구조를 만들어낸다.

1954년 프랑스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는 소선거구제는 양당체제를 낳고, 비례대표제는 다수 정당체제를 낳는다는 가설을 제시한 바 있다. '뒤베르제의 법칙'은 정치학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법칙 중 하나로 손꼽힌다. 즉 자유한국당이 주장하는 분권형 대통령제 등의 권력구조 개편을 말하기 위해서는 선거제도 개혁이 선행돼야 한단 얘기다.

따라서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득표율에 따라 정당별로 의석을 배분하기 때문에 사표가 발생하지 않는다. 지난 2016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이미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권역별로 적용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국회의원 선거에 적용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은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2일 김성태 원내대표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개헌 논의가 이뤄지면 국가 권력구조 개편과 함께 선거구제 개편, 권력구조 혁신 이 세 가지 문제는 필연적으로 맞물릴 수밖에 없다"며 "그렇기 때문에 선거구제 개편에 대해 기존의 입장에 함몰되고 매몰되지 않겠다. 개헌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우리 입장도 통 크게 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변화 가능성만 제기하긴 했지만,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데다, 일의 선후가 뒤바뀐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게다가 자유한국당은 이미 지방선거 동시개헌을 무산시킨 바 있다. 개헌 무산의 책임이 큰 자유한국당이 개헌을 먼저 들고 나오는 것은 민주당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크다. 실제로 3일 오전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개헌 문제가 국회에서 폐기 처분된 게 엊그제"라며 "지금 갑자기 원 구성 협상을 앞두고 개헌을 해야하다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자유한국당의 개헌을 정쟁의 도구로 이용할 의도가 아니라면, 국회 원 구성 협상에 협력하고 개헌 주장에 앞서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의견제시부터 해야 한다. 이미 연동형 비례대표제로의 선거제도 개혁은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에서 지지를 받고 있었다. 특히 민주당의 경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당론으로 삼기도 했었다.

민주당이 선거제도 개혁에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은 진보야당과 시민사회에서도 체감하고 있는 문제다. 하지만 자신들이 주장했던 선거제도 개혁을 거부할 명분은 없다. 반면 개헌과 선거제도 개혁을 연계하는 순간 민주당에게는 거부의 명분을 줄 수 있다. 선거제도 개혁을 개헌과 연계하는 순간 될 일도 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사회적 합의주의 8대 선진국으로 손꼽히는 노르웨이, 네덜란드, 독일, 덴마크, 벨기에, 스웨덴, 오스트리아, 핀란드는 모두 비례대표제 국가인 동시에 연정형 권력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이 주장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관철할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선거제도 개혁을 먼저 말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이미 문재인 대통령도 비례성이 보장되는 선거제도 개혁을 한다면 권력구조 개편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바꿀 수 있다는 의견을 내비친 바 있다. 자유한국당은 일의 순서를 정하고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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