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더 단순해지고 이해하기 편리해지는 TV 속 세상에서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어느 편이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가치를 추구하고 어느 편이 반사회적이고 반윤리적인 행위를 자행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단 한회만 보고 있어도 금세 파악이 가능합니다. 이런 선악구도 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용하는 단어, 판단의 기준, 대인 관계의 설정, 행동의 방향, 심지어 얼굴 표정까지도 모두 확연하게 다르니까요. 그냥 가만히 그 등장인물이 하는 행동과 말투만 딱 보고만 있어도 저 사람은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 구분이 너무나 확연해서 어쩜 드라마의 제작진들은 이렇게 시청자들에게 친절하고 자상한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속을 잘 드려다 보면 이런 선악의 구도가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정말 때려죽일 놈 같고 도저히 상종 못할 것만 같은 막장 악당도, 세상에 저렇게 미련하고 순진한 천사 같은 사람이 있을까 싶은 주인공도 한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들의 모습을 우리네 삶에 비추어 보면 정반대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거든요. 착하긴 착하고 나쁘긴 나쁜데 영 그렇게 로만 받아들이기엔 껄끄러운, 무언가 찜찜한 구석이 생겨 버려요. 세상은 그렇게 선과 악으로 딱 구분지어 살아갈 수 없는 복잡한 것이기 때문이겠죠.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속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가 봐도 확연하게 착한놈 나쁜놈으로 갈려 있는 것 같지만 이상하게 헷갈리는 부분이 생깁니다. 김탁구의 부모님은 부적절한 관계로 사생아를 낳았고, 며느리의 야욕에 희생된 것 같은 구일중 회장님의 어머니는 철저한 남존여비 사상의 구현자였습니다. 이런 비틀어진 관계는 서인숙의 타락을 만들면서 거성가 사람들의 관계를 모두 망가뜨려 버렸죠. 그러고 보면 제빵왕 김탁구는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를 따지기 어려워진,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의 이야기에요.

그럼 이런 엉망이 되어버린 이야기 속 가장 큰, 제일 불쌍한 희생자는 누구일까요? 순진하게 12년을 어머니없이 천애고아로 살아야 했던 주인공 김탁구를 지목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좀 더 찬찬히 살펴보면 이 드라마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은 김탁구와 어머니도 다르고 아버지도 다른 기묘한 형제, 구마준이에요. 이번 주 18회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었던 그는 아무리 악을 고래고래 지르고 싸늘한 악담을 쏟아 부어도 동정할 수밖에 없는, 처참하게 망가진 악역입니다.

구마준은 그의 어머니 서인숙, 아버지 한실장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콤플렉스와 패배감에 사로잡힌 인물입니다. 명목상으로는 화려하고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것만 같지만 서인숙이 자신 남편의 사랑을 쟁취한 김미순에게, 한실장이 그의 첫사랑과 사업의 성공을 빼앗아간 구일중 회장을 질투하고 그들이 차지한 것을 갈구하는 것처럼 구마준 역시 그의 형 김탁구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사랑을 끊임없이 열망하고 열등생입니다. 이들 악당들의 험한 말투와 고압적인 태도는 알고 보면 그들이 가장 절실하게 원했지만 끝내 가지지 못한 허망함, 결핍을 숨기기 위한 허례허식일 뿐입니다. 구마준이 김탁구에게 내뱉는 경멸의 말들은 결국은 한없는 부러움과 질투를 숨긴 것이에요.

그런 질투와 절망뿐이라면 구마준 역시도 그의 부모님만큼만 불행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 불쌍한 남자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아요. 방탕했던 여자관계 속에서 겨우 찾아낸 사랑, 신유경의 마음 역시도 김탁구에게 향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며 습득한 제빵 기술이지만 그의 빵에서는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형인 김탁구에게 형제애를 느끼고 팔봉 빵집의 따스함도 그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듯 했지만 그의 가슴은 끝내 마음을 열지 못하고 삐뚤어집니다. 어머니의 야망은 버겁기만 하고, 여러 사람들의 기대는 더더욱 어깨를 짓누르죠. 그러나 구마준의 가장 큰 비극은 그가 그토록 갈구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란 사실이에요. 그의 진짜 아버지는 경멸하고 무시하는 어머니의 수하, 한실장이니까요.

그러니 어머니 서인숙의 광기나 한실장의 악행이 일견 이해가 가는 것처럼 구마준의 비틀거림과 일그러짐도 이해가 갈 수 밖에요. 남편에게 버림받은 어머니의 과도한 애착과 욕심이 만든, 김탁구와 구마준에게 향하는 구일중 회장의 너무나 이중적인 부정이 키운, 그리고 자신의 형을 향한 열등감과 질투가 완성시킨 불행아 구마준의 모습은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쉽사리 욕을 할 수도 비난을 할 수도 없게 합니다. 구일중과 김탁구의 눈물의 해후에 감동과 따스함을 느낄 수 없었다면, 그건 그 장면을 눈물을 흘리며 봐야 하는 구마준의 뒷모습 때문일 겁니다.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제게 이 드라마에서 제일 나쁜 사람은 착한척하는 나쁜 아빠이나 못된 남편 구일중 회장입니다. 본래 몹시도 여리고 약한 동생 구마준은 그저 어른들의 욕심과 집착이 만든 희생양일 뿐이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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