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자신의 이름과 캐릭터로 도배하는 1인자, 시청자의 사랑으로 함께한 장수 프로그램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요? 스스로 만족해버리고 더 이상의 발전 없이 안주하는 안이함, 성공에 취해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며 추락하는 자기 관리 실패, 혹은 시대의 변화를 따르지 못하는 발 빠른 대응의 부족 등등 이유야 많습니다. 물론 그 견고한 성공의 벽이 무너지려면 단순히 하나만이 아닌 복합적인 결합 때문이겠죠. 하지만 그중에 가장 무섭고, 피할 수 없는 적은 바로 시간.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제일 막강한 흐름인 시간이란 적입니다. 이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프로그램은 아무것도 없어요.

오래된 것이 미덕이 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얄팍함과 쉴 새 없는 변화를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는 시청자들의 조급함은 더더욱 이 시간이란 적에게 무게를 실어 줍니다. 지금 대한민국 예능을 주도하는, 이른바 잘나가는 MC, 프로그램의 문제를 지적할 때 제일 먼저 제기되는 꼬투리는 식상함, 지겨움, 전과 다를 바가 없다는 구태의연함이잖아요? 매주 보는 내용이 똑같아 보이고, 그가 구사하는 재미를 만들어내는 다음 수가 뻔히 보인다는 말처럼 전성기가 끝나가는 적신호는 없습니다. 그가 지배하는 1인자의 시간이 이젠 그 유통기간을 다했다는 말이거든요.

벌써 7년, 이제 300회를 맞이하는 MBC의 놀러와, 자신의 이름을 예능 MC의 가장 윗자리에 올려놓은 지도 5년이 넘어가는 유재석에게도 가장 큰 딜레마는 역시 시간입니다. 약간의 포맷 변화, 패널의 교체, 혹은 캐릭터의 변신을 꾀하기도 하지만 이미 시청자들은 놀러와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재미의 포인트, 유재석이란 MC에게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익숙함을 넘어서는 지겨움. 이들에게도 서서히 시간이란 무서운 적이 굳건했던 자리를 슬금슬금 흔들기 시작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들은 그런 난감한, 반드시 해결해야하는 과제를 아주 유연하게, 그리고 그럴듯하게 넘겨버렸습니다. 자신들이 오래되어 보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원로 중에 원로들을 모셔두고 짐짓 어린 척 겸양을 떤 것이죠. 송해, 이상용, 그리고 이상벽이란 시간을 훌쩍 뛰어 넘은 어르신들을 모신 300회 특집은 슬슬 지겹고 식상하다는 불만이 쏙 들어가게 만드는 유쾌한 해답이었습니다. 아직 자신들은 걸어가야 할 길이 멀다는, 고작 7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기분 좋은 엄살이었죠.

그리고 이런 뒤바뀐 장수 프로그램의 엄살 속에서 전 유재석의 은근한, 그리고 확고한 야심이 엿보이더군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SBS의 런닝맨을 제외하면(하긴 SBS의 일요일 저녁은 언제나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이죠.) 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모두 장수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가 평생을 하고 싶다고 했다던 무한도전은 물론이고 300회의 놀러와, 시즌2에서 시작해 이젠 시즌3까지 이끌고 있는 해피투게더까지 그의 프로그램은 모두 생명력이 길어요. 그런 장수 프로그램들에 둘러싸인 유재석에게 가장 좋은 멘토는 바로 이들 원로 MC들이었을 겁니다. 유재석 역시도 그분들처럼 되고 싶다는, 설혹 국민MC의 화려한 위광을 평생 지키지 못하더라도 끈질기게, 오랫동안 시청자들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연예인이라면 모두가 꿈꾸는, 하지만 결코 많은 이들이 이루지 못했던 꿈이죠.

사람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변화의 흐름이 그 어떤 분야보다 과격하게 요동치는 연예계는 더더욱 그렇죠. 지금은 떵떵거리는 유재석이라고 해도 그가 어떤 사건으로, 어떤 문제로 2011년엔 사라지게 될 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죠. 하지만 그만이 가지고 있는 선한 개그, 유재석이란 MC가 가진 빛나는 재능을 오래 두고 같이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놀러와 300회 특집이었어요. 뭐 유재석 뿐이겠습니까? 강호동의 넘치는 에너지가 시간과 함께 어떻게 완숙해질지, 왕년의 1인자 김국진, 신동엽, 김용만은 시간과 함께 어떤 모습으로 또 한 번 우리 앞에 나타날지, 그리고 이미 전설을 향해 가고 있는 이경규의 50대, 60대는 또 어떻게 변화할지. 이런 저런 기대와 즐거움으로 기분 좋았던 저녁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쉽게 버리고,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에겐 이렇게 같이 늙어갈 수 있는 TV 속의 전설들이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해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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