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직전까지 이어진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그리고 지방선거라는 초대형 정치외교 이슈로 월드컵에 관심을 갖기 어려웠다. 하지만 무관심의 근본 원인은 대한민국 축구가 2018 러시아 월드컵 진출 과정에서 보여준 실망스런 경기력이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진출에 성공한 이후 치러진 지역예선에서 대한민국은 언제나 승수 제물로 여기던 카타르, 중국한테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점수는 1점차였지만 더 이상 실점을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의 형편없는 경기력이었다.

한 수 아래로 여겨지던 상대한테도 이 정도로 고전한 마당에 이젠 점점 넘사벽이 되어가고 있는 케이로스 감독의 이란과의 경기는 바둥바둥 애만 쓰다가 철저하게 상대에게 경기 지배권을 내주는 모습을 쉽게 보여주었다.

아시아에서도 상대를 압도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축구가 세계 강호들이 즐비한 월드컵에서 좋은 모습을 보일 거란 기대는 너무도 염치없는 망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조별예선 첫 경기가 다가올수록 언제나처럼 엄습하던 묘한 기대감이 서서히 뇌와 가슴을 장악하였다.

18일 러시아 니즈니 노브고로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대한민국 대 스웨덴의 경기에서 한국 골키퍼 조현우가 계속해서 스웨덴의 슛을 막아내고 있다. Ⓒ연합뉴스

고전을 면하지 못하더라도 21세기에 열린 월드컵에선 항상 첫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가져왔기에 일말의 기대감은 근거 없이 더욱 부풀려졌다. 그러나 스웨덴과의 조별리그 첫 경기 결과는 알다시피 유효슈팅 0이라는 참담한 내용이었다. 스코어는 1-0이었으나 골키퍼 조현우와 중앙 수비수 김영권의 몸을 던지는 허슬 플레이가 없었다면 최소 3-0으로 끝날 경기였다.

질 때 지더라도 끝까지 상대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 대한민국 축구의 유일한 자존심이자 팀 컬러였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전, 1994년 미국 월드컵 독일전 등은 각각 디펜딩 챔피언을 상대로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상대의 숨통을 죄여왔던 명승부였다. 그러기에 그 당시에 대표팀을 비난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러나 지난 2014년 브라질 월드컵부터 대한민국 축구에 팀 컬러에 '투혼'이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선 경기장에 쓰러질 정도로 악착같이 뛰는 모습을 좀처럼 찾기 힘들어졌다. 상대의 압박에 쉽게 허물어지고 허둥대다 자멸하는 패턴이 반복되면서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억지로 위안을 찾는다면 함께 출전했던 일본, 이란 등의 아시아 국가들이 늘 비슷한 수준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감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번 대회서는 그런 억지 위안도 기대하기 힘들 듯 싶다. 우선 이란은 모로코를 상대로 20년 만의 월드컵 첫 승을 가져왔다.

일본은 19일 오후(현지시간) 러시아 사란스크 모르도비아 아레나에서 열린 2018 국제축구연맹(FIFA)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H조 1차전에서 콜롬비아를 2-1로 꺾었다. 이로써 일본이 콜롬비아와 리턴매치에서 4년 전 완패를 깨끗이 설욕하고 월드컵 역사에서 남미팀을 이긴 첫 번째 아시아팀이 됐다. (AP=연합뉴스)

그리고 일본은 그동안 아시아 대륙 팀이 월드컵에서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던 남미팀을 상대로 첫 승을 거두는 역사를 일궈냈다. 그것도 대회 유력한 8강 후보 중의 하나로 꼽히는 강팀 콜롬비아를 상대로 말이다. 직전 대회에서도 같은 조에 속했던 콜롬비아에게 일본은 1-4로 대패를 당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두 번 당하지 않았다. 경기 초반부터 예리한 역습으로 상대를 당황시키더니 실력으로 당당히 상대를 무너뜨렸다. 일본 또한 대회 2개월 전에 감독을 교체하면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비공개 훈련과 트릭을 연발하며 베일 속에 전력을 다듬었던 대한민국보다 훨씬 짜임새 있는 조직력과 개인기를 선보였다.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역습 찬스를 잡아도 좀처럼 공격진영으로 패스를 찔러 넣지 못하고 뜸을 들이던 대한민국과는 달리, 일본은 역습 찬스에서 두어 번의 간결한 패스로 상대 공격진에서 찬스를 연달아 만들어냈다.

이미 일본과 이란은 대한민국보다 한 수 위의 기량과 조직력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월드컵 무대에서 그들은 대한민국보다 경험이 적어서인지 심장이 약해서였는지 늘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이번 월드컵을 통해 대한민국 축구보다 확실히 한 수 위에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15일 오후(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월드컵 B조 예선 모로코 대 이란의 경기. 1-0으로 승리한 이란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2년 기적의 4강 이후 16년 만에 대한민국 축구는 밑바닥으로 거침없이 돌진하고 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가 있다. 일단 대표팀 전력의 핵심이었던 박지성, 이영표의 은퇴 이후 이를 대체할 자원을 찾지 못한 점이 가장 결정적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대한축구협회의 안일한 관리역량과 해이해진 도덕성이 대한민국 대표팀의 몰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 성과 이후, 대한민국은 모처럼 국내 감독 체제로 변화를 시도했다. K리그에서 성과를 인정받은 조광래 감독을 대표팀에 앉혔고 조광래 감독은 야심차게 이른바 '만화축구'라 불리는 모험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협회는 조광래 감독을 전폭 지원하기는커녕 사사건건 선수선발에서 조광래 감독의 감정을 건드렸다. 당시 조중연 회장과 이회택 기술위원장은 조광래 감독에게 가장 큰 걸림돌 역할을 하였다. 축구계에서 재야에 속해있던 조광래 감독은 결국 중도해임 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는데, 이 과정 또한 정식적인 기술위원회 소집 없이 기습적으로 감행한 비상식적인 처사에 의해 진행된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후임감독이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감독 먼저 해임한 것이다.

이후 대표팀 감독에 별 의향이 없었던 전북 현대의 최강희 감독을 억지로 끌어내어 최종예선까지만 감독을 맡기는 기이한 행정을 펼친 축구협회는 결국 그들이 원하던 홍명보를 감독에 임명한다. 그 이후의 결과는 누구나 다 아는 처참한 것이었다. 이후 팬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은 조광래 감독 해임부터 홍명보 감독 선임까지의 시기에 축구협회 요직에 자리했던 임원들이 법인카드를 사적인 용도로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도덕성 해이의 절정을 보여줬다는 뉴스였다.

18일 러시아 니즈니 노브고로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대한민국 대 스웨덴의 경기에서 한국 신태용 감독이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이들에 대해 대한축구협회는 아직까지도 아무런 징계를 내리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번 월드컵 선전을 통해 팬들의 분노가 사그라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기적을 연출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 보인다.

차라리 이번 월드컵 실패를 통해 대한민국 축구의 근본부터 개혁하는 성찰과 실행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전히 세계 축구의 장벽은 높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A대표팀에는 수준급 외국인 감독이 임명되어야 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대한축구협회가 재택근무를 이유로 계약을 거부했던 네덜란드 감독 판 마르바이크는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을 맡아 단시간에 팀의 체질개선을 이루고 동시에 팀을 12년 만에 월드컵에 진출시키는 역량을 발휘한다. 현재는 올해 초부터 호주 대표팀을 이끌고 월드컵에 진출하여 첫 경기에서 우승후보 프랑스를 상대로 대등한 경기력을 선보이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처럼 투자한 만큼 자신의 가치를 빛내는 A급 외국인 감독은 여전히 세계축구와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아시아권 팀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7년 넘도록 이란 대표팀을 이끌면서 이란의 '늪축구'라는 끈적끈적한 팀 컬러를 정착시킨 포르투갈의 카를로스 케이로스도 전 세계가 인정하는 톱클래스 명장이다.

대한민국 축구협회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다. 진정으로 부조리를 바로 잡고 개혁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나마 월드컵 때 들끓던 냄비 팬심도 사라지게 될 것임을 처절하게 개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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