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여름은 유난히도 뜨거웠다. 유례없던 기록적인 무더위와 더불어 사상 최초로 미국 대륙에서 개최된 월드컵으로 인해 더욱 뜨거운 열기가 발산되었다. 축구의 불모지로 여겨졌던 미국에서 과연 월드컵이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을지 우려도 많았으나, 미국은 10만 명 가까이 수용할 수 있는 미식축구장의 인프라를 활용하고 다양한 국적의 관중들이 매 경기 운집하여 지금도 깨어지지 않는 역대 최다 평균관중 기록 (68,991명)을 수립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은 디펜딩 챔피언 독일(독일 통일 이후 처음으로 서독 대신 독일 국호를 달고 출전), 전통의 유럽강호 스페인(90년 로마월드컵에서 맞붙어서 대한민국은 1-3으로 패함), 남미 지역 예선에서 브라질을 꺾는 돌풍을 일으킨 볼리비아와 한 조에 속하였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위)와 스웨덴 축구대표팀(아래)이 17일(현지시간) 러시아 니즈니 노브고로드 경기장에서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1차전을 앞두고 공식 훈련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시 조편성에 대해 '죽음의 조'와 다를 바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나마 월드컵 첫 출전국인 볼리비아를 상대로 1승을 노린다는 것이 주요 전략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경기내용은 가장 만만하다 여겨졌던 볼리비아 전보다 스페인과 독일 전에서 훨씬 나은 모습을 보였다.

스페인과의 첫 경기에서 상대에게 2골을 먼저 내주고도 후반에 극적으로 동점을 이루면서 승점을 따냈고, 독일과의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에선 전반에 3골을 먼저 내줬지만 (골키퍼 최인영의 어이없는 실수로 2골을 헌납했다. 후반전에 교체 투입된 골키퍼는 당시 경희대에 재학 중이었던 이운재), 후반전에 상대를 넉다운 직전으로 몰고 가는 투혼을 발휘하면서 2-3으로 아깝게 경기를 내주었다.

94 미국 월드컵은, 이번 월드컵 지역예선 때 대한민국 대표팀을 두고 회자된 유행어를 붙인다면 그야말로 '본선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본선에 진출 당한 것'이었다. 93년 아시아 지역 예선 최종전에서 대한민국은 북한을 3-0으로 눌렀으나 동 시간에 펼쳐지는 일본과 이라크의 경기 결과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경기종료 막판까지 일본이 2-1로 앞서고 있어서 대한민국의 본선 진출은 어려울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종료 막판 이라크가 극적으로 동점골을 넣었고 대한민국은 이라크의 도움(?) 덕분에 기적같이 월드컵 출전권을 획득하였다.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1차전 스웨덴전을 하루 앞둔 17일 오후(현지시간) 러시아 니즈니 노브고로드 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훈련에서 신테용 감독이 선수들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서 당시에도 대표팀을 두고 역대 최약체라는 비아냥이 맴돌았다. 하지만 당시로는 월드컵 출전 이래 최초로 승점 2점을 획득하는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다. 만약 스페인, 독일이라는 상대의 이름값에 주눅 들지 않고 경기 초반부터 대한민국의 축구를 구사했다면, 그리고 볼리비아를 상대로 승리의 부담감에 짓눌리지 않고 경기를 펼쳤다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졌을 거라는 아쉬움의 가정법이 회자됐다.

24년이 지난 2018년 냉전시대 미국과 더불어 양강체제를 구축했던 러시아에서 사상 첫 월드컵이 열리고 있다. 디펜딩 챔피언은 24년 전과 똑같이 독일이고, 대한민국은 디펜딩 챔피언 독일뿐만 아니라 20년 전 3-1 패배의 수모를 안긴 멕시코, 그리고 지역예선에서 브라질에 이어 가장 많은 월드컵 우승을 기록한 이탈리아를 침몰시킨 스웨덴과 한 조에 속해 있다.

오늘 대한민국은 스웨덴과 운명의 일전을 앞두고 있다. 바로 직전에 펼쳐진 독일과 멕시코 전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멕시코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빈틈없어 보이던 독일마저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를 겪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24년 전에도 독일은 첫 경기에서 볼리비아에 시종 일관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오심이 곁들여진 클린스만의 골로 겨우 승리를 거머쥐었다(클린스만의 골은 명백한 오프사이드였음).

1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F조 독일-멕시코 경기에서 독일 토마스 뮐러(가운데)가 멕시코 수비들과 공중 볼을 다투고 있다. Ⓒ연합뉴스

24년 전 독일도 지금 못지않게 빈틈없어 보이는 전력으로 칭송 받았었다. 이번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대한민국의 부진한 경기력은 팬들의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마지막 두 경기에서 무승부를 거두고 본선진출을 확정한 것에 대해 '월드컵에 진출당했다'는 냉소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24년 전 유사한 상황에서 선배들은 투혼을 발휘하여 모두에게 박수를 받는 성과를 일구어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부담감에 너무 주눅 든 나머지 제 실력을 더 발휘할 기회를 놓친 점이었다. 이제 스웨덴과의 첫 경기를 앞두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바라고 싶은 점은 절대 주눅 들지 말고 경기장에서 쓰러질 각오로 투혼을 발휘해 달라는 점이다. 공은 둥글기에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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