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큰일이다. ‘헬조선’의 국민들은 정치도 믿을 수 없고 검찰도 못 믿는 불행 속에서 살아왔는데 이제 사법부도 믿을 수 없게 됐다. 스스로 온갖 의혹의 대상이 돼놓고 제대로 수습조차 못하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7일 전국법원장들이 연 간담회의 결론은 최근 법원을 둘러싼 여러 의혹을 검찰의 손에 맡겨 해결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날 모인 법원장들은 “사법행정권 남용행위가 법관의 독립과 사법에 대한 국민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점에 책임을 통감한다”면서도 검찰 고발 등의 조치는 필요하지 않다는 판단에 합의했다.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날 상황을 전하는 언론의 보도 내용을 보면 법원장들의 판단은 표면적으로는 ‘법리’를 근거로 한 걸로 보인다. 이들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의 성향을 분석하고 상고법원 도입 등에 부정적인 판사에게는 압력을 행사했으며 청와대와 일종의 ‘딜’을 시도했다는 등의 의혹이 문제라는 판단에는 대개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행위를 범죄로 볼 것이냐에 대해선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의혹에 죄를 묻기 위해선 직권남용 성립 여부를 따져야 하는데,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가까운 판사들은 실행되지 않은 계획을 근거로 위법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사법부 내의 고위직인 법원장이나 부장판사들은 대개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모양이다.

특히 법원장들의 반발이 강했던 대목은 ‘재판거래’ 의혹이다. 법원행정처가 정권이 반길만한 판결을 내리도록 대법관들을 압박하고 이를 근거로 청와대와 거래를 시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부 법원장들은 김명수 대법원장의 책임을 거론하면서 재판거래 의혹을 공개적으로 부정해달라는 요구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반대쪽에서 보면 이런 행태는 스스로 ‘제 머리 못 깎는 중’임을 실토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혐의 적용을 따지는 게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본인을 포함해 당시 중요 역할을 한 인사들을 특별조사단이 제대로 조사하지 못해 ‘명확한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탓도 있기 때문이다.

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국 법원장 간담회에서 법원장들이 순국선열들을 위한 묵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법리의 문제도 있겠지만 현실적인 이유도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검찰의 손에 맡기면 앞으로 재판 결과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식의 얘기도 나온다. 판사와 검사 사이의 뿌리 깊은 경쟁의식도 작용하는 듯 보인다. 명분과 실리 양쪽 모두에서 검찰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법적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고위 법관들의 의견에 아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판사 개인이 범죄를 저지른 문제라면 당연히 검찰 고발이 필요하지만, 사법부의 구조와 직결되는 이런 문제를 검찰 손에 맡길 경우 발생할 여러 부작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법관 독립이 침해될 수 있다는 주장은 이런 배경을 의식한 것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젊은 단독, 배석 판사 등은 검찰 수사의 필요성을 강하게 요구하는 분위기다. 이들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다소 고압적 태도로 ‘모르쇠’에 가까운 입장을 낸 이후 자체적으로 회의를 열어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11일 예정된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서는 주로 이런 주장이 힘을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

11일이 지나면 이후 상황은 김명수 대법원장의 결단에 달렸다. 문제는 어떤 결단을 내리더라도 이후 사법부 내의 혼란과 갈등 심화는 ‘상수’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검찰 수사 의뢰를 결단하면 고위 법관들이 반발할 것이고, 검찰 수사를 포기하면 젊은 일선의 판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이 사법부의 자체 해결 가능성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점이 저울 한쪽에 올려져 있다면, 다른 한 쪽에는 고위 법관들의 입장을 검찰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균형을 이룬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미 법관들이 “죄가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데 검찰이 무슨 수로 재판에서 유죄를 입증하겠는가?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니 사태는 그야말로 예정된 시나리오대로 흘러갈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되면 김명수 대법원장은 개혁의 동력을 일부 잃게 된다. 특히 사법부처럼 폐쇄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조직의 경우 가장 큰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 의지를 관철시키는 방식의 개혁이 먼저 시도될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 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기 전에 양쪽의 반발에 부딪쳐 한계를 노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법부의 구성원들이 고민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검찰 수사 의뢰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직권남용 혐의를 걸 수 있느냐 없느냐 등의 기술적 쟁점은 어떻게 보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 있다. 그것보다는 법원 스스로가 사법부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게 더 시급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당시 법원행정처 등 주류의 방식은 노선이나 가치가 아닌 이해관계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모습의 전형이다. 이들은 상고법원 설치 여부를 법원이 어떻게 하면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는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법부에 이득이 되는 과제 달성의 맥락에서만 사고했다. 그러니 ‘공작’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이번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선 이런 사고방식을 먼저 뜯어 고쳐야 한다.

물론 법원을 ‘정치적 진공 상태’로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법원이 다뤄야 하는 수많은 사건은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법원의 판결이 정치적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를 규정하는 효과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법부는 ‘판결 기계’를 자처하기 보다는 우리 사회의 지향을 함께 만드는 역할을 피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 재판 과정 속에서 각자의 판단과 신념을 갖고 이뤄져야 하는 것이지 개별 판사들에 대한 통제와 관리, 자리를 둘러싼 암투 및 공작, 권력과의 거래로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이를 바로 잡으려면 다소의 무리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검찰 수사 의뢰 등의 과감한 조치를 감행해야 한다. 검찰이 불기소 처분을 하더라도 법관들의 변화와 개혁에 대한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정 안 되겠다면 검찰 수사 의뢰에 비견할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고 내놔야 한다.

그런데 김명수 대법원장이 언급하는 대책들은 사람들이 검찰 수사 의뢰의 필요성을 잊게 할 만큼의 효과를 내지는 못할 것 같다. 오히려 개혁 의지를 갖고 있는 대법원장의 권한만 축소되는 게 아닐까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보수세력이 호시탐탐 김명수 대법원장의 무력화를 모색하는 이런 상황일수록 과감한 행보가 필요하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상식을 뛰어 넘는 결단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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