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를 따라 평양으로 월북한 이후 김하늘의 존재감이 미미해졌다. 로드넘버원이 전쟁영화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잉글리시 페이션트도 아닌 이상 계속 전투를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해도 소지섭이 전쟁을 하는 이유인 김하늘이 전혀 나오지 않을 수 없지만 반복되는 치료와 전쟁고아와의 일화는 지루한 감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김하늘 곁에서 지루함을 지워주는 배우가 있다. 인민간호부(극중에서는 간호사라는 말을 썼지만 당시에는 간호부 혹은 간호원이라 불렀다) 김예리는 생명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자세와 자신이 군관에게 폭행당할 때 온몸으로 보호해준 김하늘에 대해서 마음을 서서히 열어가는 역할을 맡았다. 결국 국군의 북진에 따라 후퇴를 결정한 인민군 수뇌로부터 버림받은 오빠와 함께 김하늘은 김예리도 같이 행동하기로 한다.

사실 김예리가 맡은 역할은 튀지 않는다. 빼어난 미모도 아니고,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배우도 아닌 김예리는 쌍커플 조차 없는 수수한 외모의 배우다. 그러나 이북사투리를 똑소리나게 구사하면서 감정과 대사 호흡이 대단히 정확해서 작은 목소리도 아주 또렷하게 전달했다. 10회에서 헤어진 오빠에 대해서 말할 때는 감정을 다스리면서도 북받치는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는 쉽지 않은 연기를 보였다.

김예리의 역할은 김하늘 등장신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고명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김하늘의 대사와 감정이 변화 없이 반복된 탓인지 김예리의 존재감은 잔잔하지만 묵직하게 커져갔다. 보통은 까메오로 출연한 황보라의 경우처럼 광녀 연기 등이 눈에 금방 띄지만 연기하기로 따지자면 김예리가 맡은 역이 훨씬 더 어렵다는 점에서 명품조연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게 한다.

로드넘버원 홈페이지에 역할과 배우 이름만 간단히 소개된 김예리는 연극을 바탕으로 몇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누리집에 어지간한 연예인 프로필은 모두 나오지만 김예리에 대한 정보는 없다. 겨우겨우 <씨네21>에 그녀에 대해 잘 정리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김예리는 국악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을 졸업했다. 전공은 무용. 사실 이정도 스펙이면 전통무용계에서는 엘리트 자격을 갖춘 재원이다.

그러나 한예종 재학 중 영상학과 교수를 도와 영화 <그림자>에 출연하게 된 것을 계기로 춤에서 연기자로 업종전환을 단행했다. 이후 <기린과 아프리카>로 그는 미쟝센단편영화제, 대구단편영화제 등에서 연기상을 수상했고 <푸른 강은 흘러라>에서는 여주인공도 했다. 그래도 누구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예리는 로드넘버원과 동시에 인터넷 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indiesitcom.com>에 해리성장애를 가진 이모미로 출연 중이다.

김예리의 이력을 보면서 언뜻 떠오른 것은 MBC 월화드라마 동이였다. 이제는 돌이키기에 늦었지만 장악원 여령(여자무용수)나 혹은 설희 밑의 기생 역으로 나와 제대로 된 춤사위를 보여줄 수 있는 사극에 특화된 배우로 클 수도 있겠다 싶다. 쌍꺼플 없는 김예리가 곱게 쪽지고 살풀이 한번 흐드러지게 추면 대단히 멋들어진 장면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 살풀이를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나이가 어리지만 그래도 흉내만 내는 것과는 분명 차원이 다른 춤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 첫 주연작 <푸른 강은 흘러라>와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의 김예리

졸업한지 3년이니 나이는 20대 중반으로 짐작된다. 요즘 드라마의 대세는 사극인 만큼 똑부러지는 대사에 전통춤의 특기까지 가졌으니 충분한 활약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모두 갖췄다. 거기다가 한국무용을 오래한 사람치고 한복태가 나지 않을 수 없으니 카메라 테스트는 안하고 통과해도 좋을 것이다.

로드넘버원은 사실 최민수의 이른 죽음 이후 급속도로 시들해졌다. 최민수가 짧게 보여준 많은 것들이 소지섭에게 옮겨갈 것을 진작부터 알았지만 그래도 성급한 죽음이었다. [이전글 참고- 최민수는 소지섭의 미래 ]소지섭에게 너무 많은 것을 떠넘긴 바람에 현재 소지섭은 최민수도 소간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러서 울기만 잘하는 배우가 돼버렸다. 그래도 알지 못할 뭔가에 이끌려 본방 사수하던 차에 김예리의 존재는 가뭄에 단비처럼 반가웠다. 앞으로 그녀의 활약을 끈질기게 지켜봐야겠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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