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뜨거운 형제들의 노유민이 무모하게 시도했던 만득이 시리즈만큼 기억 속에 아득하지만, 한때 MBC의 정통 개그 프로그램이 부흥한 것처럼 보이게 할 정도의 힘을 보여 주었던 코너가 하나 있었습니다. 무명 개그우먼이었던 김미려를 단숨에 스타로 만들어주었던 그녀의 대기업 사모님 연기였죠.

지극히 한정된 것을 부각시켜 과장한 표현들이긴 했지만, 이른바 상류 사회에 급격히 진입한, 하지만 별다른 교양도 품위도 상식도 없는 속물 사모님의 포인트를 잡아 체화한 그녀의 개그는 왠지 모를 후련함과 공감을 이끌어내며 인기를 끌었었습니다. 한껏 고양된 콧소리로 ‘김기사 운전해’를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른바 잘난 사람들의 가식과 허위를 드러내며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무지렁이인 우리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힘이 있었어요.

제빵왕 김탁구의 성공을 이끈 요소는 다른 성공작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이것 때문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빵으로 성공한 한 재벌가의 이상하게 꼬인 가족사를 기본으로 하는, 단순하고 전형적인 이야기를 토대로 시작했지만 김탁구의 성장드라마는 물론, 각종 액션 활극과 재벌가의 치정극, 젊은 주인공들의 4각 러브스토리, 제빵을 중심으로 하는 전문직 드라마에 80년대 시대극까지 각종 변형이 가능한 이 잡종 드라마는 이 모든 것들을 비빔밥처럼 섞어 놓으며 수시로 시청자들의 눈을 잡아끌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한 곳에 묶었으면서도 그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이 드라마가 은근히 치밀하고 영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지만 제가 김탁구에 매료되는 부분은 이런 만물상 같은 다양한 재미를 구사하는 연출의 묘미가 아니라 이 복잡한 혼돈 속에서도 꿋꿋하게 빛을 내고 있는 각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들입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납득할 수 있는 삶의 이유를 붙잡으며 분투하고 있는 과정들이 겹쳐지는 모습은 이 드라마가 중심을 잃을 듯 잃을 듯하면서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는 힘이에요. 그리고 그런 쟁쟁한 이들 중에서도 저는 전인화의 막장 사모님 연기에 푹 빠져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주는 김탁구의 서인숙 같이 이렇게 생생한, 그리고 노골적인 사모님 연기는 처음 봤어요.

어쩌면 김미려가 연기했던 사모님처럼 우리가 대재벌 집안의 사모님이면 이럴 것이라는 편견과 판단들을 다 합쳐놓는다면 김탁구의 서인숙 같은 여자가 나오지 않을까요? 세상을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양, 도도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사람을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철저히 구분해서 낮은 이를 아래로 내리깔 듯이 경멸하는 이 높으신 여인은 이 드라마의 가장 강력한 악의 축이자 모든 갈등의 원인입니다. 그녀의 말투, 표정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세상에 밉상도 이런 밉상이 또 없어요.

하지만 이런 잘난 척도 그 안의 추악함과 무기력함을 덮기 위한 얄팍한 포장일 뿐입니다. 겉으로는 고상한척 하고 남들과 다르다는 특권의식에 가득 차 있지만 그녀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선 어떤 범법도 패륜도 악행도 서슴지 않는 그야말로 속물과 다를 바가 없죠. 게다가 정작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라고 해봐야 김미려가 김기사를 외치는 것처럼 자신의 정부 한실장을 다그치고 부탁하고 기다리는 것 외엔 없어요. 허영과 욕심으로 살아가지만 정작 그것을 실현할 힘은 부족한 반쪽짜리 무력한 욕망덩어리. 그녀가 보여주는 사모님의 모습은 바로 이런 편견과 비웃음 위에 만들어져 있어요.

그런데 단지 그것에서 그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녀는 단지 삐뚤어진 마귀할멈이 아니란 것이죠. 서인숙의 욕망은 자신이 속한 거성 그룹에 대한 자부심, 남편의 매정함에 목마른 아내로서 품는 애정결핍, 어머니로서 자식을 정상의 위치에 올려놓고 싶은 모정이 결합된 설명 가능한, 납득할 수 있는 욕심꾸러기에요. 그리고 그 욕심이 표출되는 그녀의 왜곡된 편견은 너무나 확실하게, 일관되게 붙잡고 있는 생각 위에 있기에 오히려 후련합니다. 서인숙은 자신의 욕망과 삶의 방식에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이에요. 그 방향이 너무나 노골적이고 적나라할 뿐이지, 적어도 이중적이거나 모순적이지는 않죠. 그런 당당함이 외려 이 냉정한, 잔혹한 악녀에게 매력을 부여합니다.

뭐랄까. 막장 사모님이 풍기는 그녀만의 매력이라고나 할까요? 아무리 봐도 정이 가지 않는 인물이지만 왠지 측은하고 조금은 불쌍하고 이해가 가는 악당. 그 아등바등 거리며 발버둥치는 모습이 묘한 정을 느끼게 하는 이상한 악역. 제빵왕 김탁구의 서인숙은 완숙한 배우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전인화의 우아한 연기와 함께 펄펄 뛰는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의 성공이 악역의 매력과 호소력에 달려있기에, 김탁구 성공의 일등공신을 뽑으라면 전 누가 뭐라 해도 전인화, 그녀에게 한 표를 던지고 싶네요. 그녀가 풍기는 이 지독한 매력은 보면 볼수록 빠져들 수밖에 없어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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