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정상회담은 일단 청신호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현지시각 5월 31일 뉴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영철 북한 조선노동당 부위원장과의 고위급 회담 결과를 설명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지난 72시간 동안 실질적 진전이 이뤄졌다”면서 “합의에 이르려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과감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했다. 북미간의 이견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김영철 부위원장이 워싱턴DC를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접견할 예정이라는 대목도 일단은 긍정적 신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김영철 부위원장이 현지시각 1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자신에게 전달할 것이라며 긍정적 내용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영철 부위원장 접견을 기정사실화한 것은 폼페이오 장관과 김영철 부위원장의 회담이 기대한 내용대로 진행됐다는 걸 의미한다.

회담을 진행 중인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김영철 북한 조선노동당 부위원장 (연합뉴스)

미국이 싱가포르 회담을 위한 실질적 준비에 들어간 정황이 계속 확인된다는 것도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기대할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다. 언론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예상 숙소까지 거론되고 있다. 일부 보도에 의하면 백악관은 북한과 소통할 수 있는 한국어에 능통하고 한반도 문제에 전문성을 갖춘 인력들을 재외공관과 주한미군에서 차출하고 있다고도 한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이 특유의 기질을 발휘해 마지막에 북미정상회담을 다시 무산시킬 가능성도 남아있다. 비핵화 협상의 ‘허들’을 높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표적인 것이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 포기 요구이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WMD포기를 강제해야 한다는 원칙에 수차례 합의한 바 있다. 성김 주필리핀 미국 대사와 최선희 북한 외무부 부상이 폼페이오 장관과 김영철 부위원장의 회담 이후에도 추가로 협상을 이어갈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는 것은 이런 정황 때문인 걸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비핵화가 아닌 다른 문제로 북미정상회담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미국의 WMD 관련 요구는 비핵화 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북한이 CVID 원칙을 명문화하고 이를 보장할 수 있는 가시적 조치를 취하면 미국이 실질적 체제보장을 약속해주는 형태로 비핵화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북한이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미국 또는 제3국으로 반출하고 미국은 의회에서 비준하는 ‘조약’의 형태로 김정은 정권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형태를 예상할 수 있다. 이 경우 북한은 자신들의 핵무기 관련 기술의 완성 정도를 미국에 모두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을 안아야 한다. 핵무기 관련 기술이 미국의 예상보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드러나면 북한은 이후 협상에서 불리한 상태가 된다.

물론 부담이 큰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북미정상회담의 결과를 미국 조야가 미진한 것으로 볼 경우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가시적’ 조치가 더욱 절실하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자신이 북한의 핵무기를 아예 빼앗아왔다는 선전이 가능한 그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 점에서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북미정상회담에서의 비핵화 협상은 타결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 북미정상회담 이후 국제사회의 제재가 완화되면 북한도 과거의 중국처럼 개혁 개방을 통한 고도성장을 시도할 수 있다. 핵무기를 포기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입장에선 경제 발전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찾아야 한다. 동아시아의 군사적 재균형 국면에서 북중러 대 한미일의 갈등구도는 여전할 가능성이 크지만 최소한 과거와 같은 형태는 아닐 것이다. 시대가 변화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남한 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보면 어떨까. 전통적인 보수세력의 기반이 됐던 반공주의가 단기간 내에 사라지리라 보긴 어렵다. 영향력이 급격히 축소되더라도 현재와 같은 상황을 가능케 했던 핵심 정서는 또 다른 극우적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보수정치가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 오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5월 31일 자유한국당과 조선일보 사이에 벌어진 사건은 의미심장하다.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은 31일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께 보내는 공개편지’를 공개하고 양상훈 주필의 파면을 요구했다. 이날 조선일보 지면에 실린 양상훈 주필의 칼럼이 조선일보의 정체성에 맞지 않고 심지어는 보수세력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강효상 의원은 “미 당국자들이 이 칼럼을 보고 한국 보수의 한 축인 조선일보가 북한에 항복했다는 시그널로 인식하게 되면 그 책임을 어쩌려고 하십니까”라면서 “양상훈의 기회주의적 행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라고까지 했다. 이런 주장은 정치적 과대망상과 사내정치에서 남은 뒤끝의 묘한 결합처럼 보인다.

강효상 의원이 문제 삼은 양상훈 주필의 칼럼은 물론 우파의 시각이긴 했지만 합리적으로 볼만한 내용이다. 북미 간의 협상에도 북한의 모든 핵무기를 제거할 수 없게 되더라도 일종의 억제 효과를 강제할 수 있고, 북한의 개혁개방이 가속화되면 독재정권의 변화 또는 붕괴를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과의 협상 타결을 밀어 붙이는 정국에서 친미를 자처해온 신문이 충분히 취할 수 있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강효상 의원이 이 칼럼을 문제 삼는 이유는 자기들끼리의 어떤 사연도 있겠지만 결국 자유한국당이 문재인 정권의 해법을 결국 북핵을 인정하는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왼쪽)가 지난해 7월 강효상 대변인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조선일보가 반드시 자유한국당과 정파적 이해관계를 같이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고 자유한국당도 이를 조선일보에 강제해선 안 된다. 강효상 의원의 편지는 정파적 논리가 논조를 압도하는 현재의 언론 지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양상훈 주필의 칼럼을 보고 한겨레신문을 보고 있는지 깜짝 놀랐습니다”라고 쓴 대목이 그렇다.

불행한 것은 이런 정파 논리를 딱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조선일보는 문제의 31일 지면에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의 최근 행보를 비판하는 기자 칼럼을 실었다. 김의겸 대변인이 조선일보와 TV조선 일부 보도 내용을 거론하며 발목잡지 말라는 취지로 공개 비판한 것에 대한 반발이다.

조선일보는 이 글에서 “김 대변인이 30년 가까이 몸담았던 한 신문은 ‘미·북 정상회담 평양 개최’부터 지난 주말의 2차 남북 정상회담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전화 통화를 하다가 즉석에서 회담으로 이어졌다는 등의 오보를 했다”며 “이런 일들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유독 조선일보만을 문제 삼은 이유가 무엇일까”라고 썼다. 청와대와 언론의 갈등구도를 한겨레와 조선일보의 대결로 정파화한 것이다. ‘1등신문’을 자처하는 언론이 스스로 이를 선택한 것은 놀랍다.

본격적인 선거운동기간이 시작됐지만 유권자들은 시큰둥한 반응이다. 여기에는 정치가 이런 한심한 장면을 반복하며 스스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도 작용할 것이다. 시대가 변하는 만큼 보수정치도 변해야 한다. 청와대도 언론을 정파적으로 적대하기 보다는 권력이 언론을 다루는 모범적 방식을 취하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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