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복싱은 현재 유럽 축구 마니아들이 많은 것처럼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 스포츠였습니다. 세계챔피언에 오른 선수는 영웅 대접을 받았고, 또 아마추어 선수들이 출전하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도 좋은 성적을 낸 선수들이 많아 그야말로 황금기를 누려 왔습니다. 하지만 '배고픈 스포츠', '위험한 운동'이라는 인식이 강해지기 시작하면서 복싱은 쇠퇴의 길을 걸었고, 변변한 세계 챔피언 한 명 배출하지 못하는 수준으로까지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한국 복싱에서 프로, 아마추어를 가리지 않고 연이어서 악재가 터지면서 그야말로 또 한 번 최대 위기에 빠졌습니다. 프로복서 배기석이 한국 슈퍼플라이급 타이틀 매치가 끝난 뒤 구토 증세를 보인 뒤 쓰러져 대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뇌출혈로 사망하면서 충격에 휩싸이게 됐습니다. 배기석은 지난 17일 충남 예산에서 열린 정진기와의 타이틀 매치에서 8회 TKO 패한 뒤 갑자기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져 인근 병원으로 옮겼지만 더 이상 의식을 찾지 못하면서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지난 2008년 12월, 세계챔피언이었던 최요삼이 경기 도중 쓰러져 안타깝게 숨진 지 1년 7개월 만에 이 같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 1986년,인천 선인천체육관에서 벌어진 WBA주니어 플라이급 타이틀전. 챔피언 유명우와 도전자 일본의 기유나 도모히로의 경기장면. 관중이 가득 찰 만큼 복싱은 1970-80년대 상당한 인기를 얻었지만 지금 이같은 광경을 보기는 상당히 어려워졌다. ⓒ연합뉴스
이에 앞서 지난주에는 국제복싱연맹이 세계복싱선수권대회 개최지를 부산에서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바뀐 것으로 알려져 세계선수권 개최를 계기로 아마추어 복싱 중흥을 노렸던 한국 복싱계에 찬 물을 끼얹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국제복싱연맹 총회 역시 부산에서 카자흐스탄 아스타나로 변경해 파문이 일었습니다. 이번 개최지 변경은 국제복싱연맹과 대한복싱연맹 간의 갈등이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세계선수권을 유치하고도 조직위원회조차 꾸리지 않는 등 뜸 들였던 행보가 결국 발목이 잡히면서 스포츠 외교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됐습니다. 이미 지난해 아시아선수권, 실내아시아선수권 출전이 국제복싱연맹의 징계로 인해 어이없게 이뤄지지 못했던 가운데서 세계선수권 개최로 전환점을 노렸던 한국 아마추어 복싱은 그야말로 최대 위기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생활 체육으로서 복싱이 각광받고 있지만 정작 선수 생활을 하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한국 복싱에 적지 않은 장애 요소가 됐고, 이제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복싱계 내부적인 밥그릇 싸움, 너무나도 각박하고 열악한 내부 환경이 선수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선수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내부적으로 변화를 꾀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열악해진 내부 사정은 챔피언들이 하나둘 떠나는 계기로 이어졌고, 명맥이 완전히 끊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나마 여자 선수들이 분전을 하고 있다 해도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대전료를 지불하지 못하고 투잡을 뛰는 안타까운 상황도 볼 수 있었습니다. 세계 복싱의 전설과 같은 호세 술레이만 세계복싱평의회장조차도 "한국복싱이 사자 같이 용맹스러운 세계챔피언은 다 어디 가고 왜 바닥에 떨어졌는지 궁금하다”면서 안타까워할 만큼 한국 복싱의 현 세태는 '빨간불 경보' 수준을 넘어선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옛 챔피언들이 복싱 중흥을 위해 힘써 나갔고, 내부적으로 발전책을 고민하면서 세계선수권도 유치하는 등 중흥 의지는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지가 전면적인 환경 개선, 개혁으로까지 이어지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선수 보호 문제, 그리고 내부적인 문제 등이 근본적인 해결점 없이 잇따라 이어져오다 결국 프로와 아마추어 모두에 잇따른 악재가 터지면서 1980년대 후반에는 정말 생각지도 않았을 최대 위기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그야말로 팬들의 외면을 받고 있는 가운데서 잇따른 사고, 사태로 더욱 외면을 받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가 됐습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넘어갔을 때 복싱계는 물론이고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체육계 전반이 나서서 한국 복싱이 조금이라도 일어설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을 찾아나가는 것이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 보입니다. 선수 보호, 처우 개선 등 복싱 선수들이 정말로 운동에만 전념해서 국위 선양하는 쾌거를 이룰 수 있게끔 '말로만 중흥'을 외칠 것이 아니라 모두가 납득할 만 한 실제적인 중흥 방안을 내놓아야 옛 영광을 조금이나마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한때 국민들에게 큰 희망이 됐던 복싱이 이렇게까지 쇠퇴하게 돼서 어쨌든 참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대학생 스포츠 블로거입니다. 블로그 http://blog.daum.net/hallo-jihan 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스포츠를 너무 좋아하고, 글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