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도우리 객원기자] 어제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 여부를 가리는 헌법소원 공개 변론이 있었다. 2012년 낙태죄 합헌 판결이 있은 지 6년 만의 일이다. 이 역사적인 판결에 앞서 많은 단체와 인사들이 의견을 보탰다. 그중 여성가족부는 정부 부처로는 처음으로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공식 의견을 냄으로써 과거보다 진일보한 인식을 보여줬다. 반면 법무부는 ‘흑역사’가 될 발언을 남겼다.

법무부는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에 대해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원하지 않음’을 ‘책임지지 않음’으로 해석한 점이다. 법무부는 “강간 등의 사유를 제외한 자의에 의한 성교는 응당 임신에 대한 미필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며 이에 따른 임신을 ‘원하지 않은 임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낙태죄 폐지 시위(연합뉴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이 ‘섹스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다. 섹스로 임신 후 낙태하는 것은 현행법상 죄로 규정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낙태죄가 없으면 섹스는 죄가 될 이유가 없다. 여성들이 굳이 불필요한 책임을 떠안지 않아도 된다. 마찬가지로 법무부가 남성은 낙태죄 처벌 당사자가 아니라는 지적에 대해 병역 의무를 사례로 들며 ‘신체 조건이 달라서’라고 한 것도 선후 관계를 뒤바꾼 것이다. 신체 조건이 아니라, 낙태죄 조항 때문에 남녀가 다른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

그간 임신으로 인한 책임은 오히려 남성 쪽에 있었다. 섹스 후 임신의 불안을 느끼는 여성에 대해 ‘오빠가 책임질게’라고 하는 말이 그것이다. 미혼 여성이 임신하면 사회적 지위가 아주 불안정해지는데, 그 지위는 ‘오빠의 결혼 결정’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히트 앤드 런(hit and run) 방지법처럼 임신에 대해 남성에게 법적 책임을 부과하지 않는 현실에서, ‘오빠가 책임질게’는 남성의 사랑을 증명하는 로맨틱한 지표가 되었다. 동시에 ‘계속 만나주지 않으면 신고한다’는 협박 수단도 되었다.

하지만 오빠의 책임에는 한계가 있다. 여성의 비혼 의사는 물론 결혼으로도 임신, 출산으로 인한 신체 변형과 사회적 낙인, 경력 단절, 경제적 부담, 열악한 육아 환경은 감당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계 GDP 순위 11위이면서 아동 수출 순위는 지난해 3위를 기록한 우리나라 현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낙태가 여성과 오빠, 개인들이 오롯이 책임질 사안이 아닌 이유다.

박상기 법무부장관(연합뉴스)

그런데도 법무부는 ”임신과 출산은 여성에게 충분한 자유가 보장된 ‘성행위’에 의해 나타난 생물학적 결과”라는 궁색한 주장을 했다. 우리는 노화로 인한 질병을 가만히 앉아 받아들이지 않는다. 생물학적 결과로 따지면 주변 환경에 위협을 느껴 새끼를 잡아먹는 동물의 사례도 많다. 피임 실패율이 30%에 이르는 임신은 여성에게 자연재해이자 공포다. 결코 대마초에 비유될 수 없다.

자연을 그대로 방기하는 것은 야만이다. 그래서 인간은 ‘문명’을 일구고 받아들인다. 현재 문명의 상황은 이렇다. OECD 35개국 중 본인 요청에 의해 낙태가 가능한 국가는 25개국이며, 예외적으로 사회 경제적 사유까지 허용하는 4개국까지 합치면 OECD 회원국의 80%인 29개국에서 임신중절을 허용하고 있다. UN 인권 이사회로부터 낙태죄 폐지 권고도 민망하리만치 지속적으로 받아 왔다. 이정도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수치다.

국가는 낙태죄를 폐지하고 모자보건법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 그리고 안전하고 합법적인 인공임신중절을 보장해야 한다. 개정 전까지 당장 여성들의 고통을 줄일 행정적 조치들이 있다. 복용이 간편하면서 건강에 부담이 적은 낙태 약물 ‘미프진’ 공급을 보장하고, 사후피임약을 처방전 없이 구매 가능한 일반 의약품으로 분류해야 한다.

얼마 전 구인회 가톨릭대 교수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강간에 의한 임신이라도 아이 낳아야...태아는 죄가 없다"라고 했다. 실제로 태아는 죄가 없다. 죄는 인격이 있는 인간에게만 성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낙태죄가 살인죄와 형량이 같지 않고, 임부에게 폭력을 가해 유산시켰을 때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는 이유다. 태아의 생명권은 인간의 생명권과 동등하지 않다. ‘이미 인간’인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생명권, 건강권이 더 중하다.

태아의 잠재성이 얼마나 중한지 강조하려고 ‘낙태된 태아가 베토벤이 될 수 있었다’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나름 시대 흐름에 맞춰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있었다’는 말까지 나온다. 학창 시절, 하품을 참아가며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탄생 연도를 암기해 쪽지 시험을 보며 괴로웠던 사람이 더 많지 않았냐는 의문은 차치하고 생각해보자. 애초에 베토벤이 나타나지 못할 뻔한 원인은 베토벤 어머니가 처한 열악한 환경이었다.

‘베토벤이 될 수 있었다’에서는 이러한 어머니의 고통과 희생에 대한 고민은 없다. 잠재성을 위해 폐경 전까지 아이를 낳을 수 없지는 않은가. 베토벤 예시는 얄팍한 공리주의이자 가부장 중심적인 발상이다. 무엇보다, 베토벤과 스티브 잡스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대가가 될 수 있었을까? 핵심은 낙태를 결심하지 않게 만드는 ‘헬조선’과 같은 현실 개선과 베토벤을 길러낼 문화 인프라 조성이다. 섹스에는 죄가 없다. 낙태를 한 여성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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