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저술가] 드루킹 사건에 대한 여러 새로운 소식이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지만 특검법도 통과된 마당에 여의도 정치에 남은 것은 말꼬리 잡기와 진실공방 정도인 것 같다. 이런 정파적 논란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히 중요한 일이지만 가끔은 좀 더 근본적 문제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때도 있다.

기성 언론이 드루킹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음모론에 가까운 것이거나 언론 그 자신의 이해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전자는 김정숙 여사의 한 마디나 ‘이어마이크’ 등으로 분위기 조성에 나섰던 조선일보의 경우를 들 수 있겠고 후자는 ‘아웃링크’로 요약된 네이버 댓글 문제 논란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드루킹 문제가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고민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김경수 의원이나 송인배 청와대 제1부속비서관이 대선 캠프 구성 전에 이들과 굳이 관계를 가진 배경을 되짚어봐야 한다.

송인배 청와대 제1부속비서관이 21일 한미정상회담차 미국으로 출국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따라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지면에서도 몇 차례 지적했지만, 김경수 의원 등 여권 유력 인사들이 드루킹 일당을 어떤 시각으로 본 것인지 재구성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등의 가설처럼 드루킹 일당의 댓글 조작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거래’를 시도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겠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은 여권 핵심들이 드루킹 일당을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 2천여명짜리 지지자 조직 정도로 판단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실제로 여권 핵심들은 드루킹들의 ‘선플운동’을 인터넷을 통한 민주적 의견 표출 정도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사실 이것은 정치권이 ‘인터넷’을 설명하는 어떤 전형이다. 그런데 드루킹들은 이 도식을 뒤집었다. 인터넷을 ‘모든 사람들의 문제제기를 보장하는 도구’라는 게 아니라 ‘우리의 문제제기를 다수의 것으로 보이게 할 수 있는 도구’로 사고한 것이다. 이런 기만적 판단을 가능케 한 것은 드루킹의 인식 속에 있는 ‘한나라당의 댓글기계’라는 존재, 즉 “상대도 그렇게 하고 있다”라는 냉소주의적 정치관이다.

우리는 이런 전도된 인터넷-민주주의관을 이미 가짜뉴스 논란에서 살펴본 바 있다. ‘가짜뉴스’란 말을 가장 무겁게 사용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사례를 보자. 트럼프식 언론관에 의하면 거의 모든 언론은 ‘가짜뉴스’이며 진실은 오직 자신이 직접 쓰는 트위터 메시지에만 있다. 폭스뉴스는 자신을 지지하는 한에서만 진실된 뉴스이다.

트럼프식 언론관은 실제로 기성 언론이 의도치 않은 오보에서부터 어떤 음모와 공작의 동반자로서의 역할까지를 수행했다거나 또는 수행할 수 있다는 인식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익히 알려졌다시피 트럼프 본인은 트위터를 실제로 진실만을 말하는 도구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자신의 트위터 메시지를 ‘진실’로 포장하는 행위가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어차피 상대도 속이고 있다”는 냉소주의적 현실 인식이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의미에서 가짜뉴스는 현실의 대안으로 나타난 셈이다. 가짜뉴스가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미국에서는 ‘대안우파’로, 유럽에서는 극우포퓰리스트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 실제 가짜뉴스는 대안이 아니며 대안우파와 극우포퓰리스트들의 인식은 오히려 기만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기만적 시도는 앞서 언급한 냉소적 정치관 덕분에 실제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생각해볼 것은 현실정치는 언제나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기만적 대안을 제출해왔다는 것이다. 과거 박정희식 국가주의를 ‘독재 대 민주주의’ 구도 속에서 신자유주의가 대체했던 게 대표적이다. 이런 경우에 ‘민주주의’라는 명분은 냉소적 정치관을 실현하는 핵심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

비슷한 사례는 외국에도 있다. 일본의 고이즈미 정권은 전후체제의 핵심이었던 이익분배형 정치의 대안으로 신자유주의를 제시하면서 족의원과 관료들이 독점하고 있는 자민당 체제를 깨부수겠다는 구호로 국민적 열광의 대상이 됐다. 현재의 아베 신조 정권의 성격도 당시의 정세에 의해 이미 규정됐다.

미국의 정치사는 이런 상황을 좀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미국은 대의제를 근간으로 하는 공화주의와 사회문화적 코드로서의 자유주의,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근대적 기획 속에서 건국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계 안에서 반연방주의, 반지성주의, 기독교복음주의, 잭슨주의, 기업가주의, 신보수주의가 모두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부여잡고 등장했다. 중앙집권주의나 동부식 지성주의, 가톨릭 및 성공회, 혁신주의 등은 모두 대중을 속이는 사기꾼들로 낙인찍혔다. 이런 ‘낙인’에는 근거가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낙인을 찍는 쪽의 주장이 명확한 대안을 포함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21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드루킹의 인터넷상 불법 댓글 조작 사건과 관련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러한 현실은 여러 가치 있는 정치학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기획 속의 민주주의가 ‘개별 시민의 의사가 반영되는 어떤 체제’ 이상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문제가 가장 잘 드러나는 현대의 사례는 민주주의가 주주자본주의와 소비자주의로 대체되는 것이다.

최근 삼성이나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문제에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끼어든 상황을 보자. 촛불시위 참가자들이 요구했던 재벌개혁의 내용은 정경분리와 적은 지분으로 계열사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왜곡된 지배구조를 개선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주자본주의에 충실한 인사들이 정책의 키를 쥐고 있는 이 정부가 재벌개혁의 첫 발을 떼자마자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정경유착의 청산을 명분으로, 소유 지분을 수단으로 하여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황당하지만 자연스러운 귀결이고,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드루킹 김모씨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드루킹들의 모임인 경공모는 회원들로부터 주주의결권을 위임받아 대기업을 장악해 이를 시작으로 세상을 바꿔 보이겠다는 야심찬 기획을 내걸고 있다. 주주자본주의와 전도된 인터넷-민주주의로서의 댓글기계, 보수정치에 대항하는 정권교체가 ‘민주주의’로 이름 붙여진 어떤 상을 공통지반으로 갖게 된 셈이다. 그 안에서는 모두가 ‘우리 편’이었다. ‘우리 편’들이었기 때문에 논공행상 과정에서 오사카나 센다이 총영사직을 두고 소동을 벌였던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드루킹들의 시도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어떤 시도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의 극복은 기술적으로 만들어진 어떤 거대한 공론장이 모든 사람의 의견을 투명하게 반영할 수 있도록 하자는 ‘직접민주주의’적 시도로만 되지 않는다. 우리가 새삼 배우는 것은 민주주의의 본래적 의미 실현을 위해서는 개별 주체들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하고, 이것은 사회구조의 변혁을 시도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늘 이 사실을 다양한 이유로 잊고 싶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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