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있다. 아이를 재우려고 자장가를 불러주다 어릴 적 아무 생각 없이 부르던 동요의 고운 가사에 애틋해지고, 아이의 독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책을 읽어주다 그 작가의 글과 그림체에 매료돼 버린다. 레이먼드 브릭스가 그랬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년과 눈사람의 우정을 그린 <눈사람>의 작가로 알려진 레이먼드 브릭스는 <눈사람> 외에도 <산타 할아버지>, <곰> 등의 작품으로 아이들은 물론, 동화책 좀 읽어줬다는 엄마들에게도 친숙한 작가이다.

그 레이먼드 브릭스가 자신의 부모님의 이야기를 작화했던 <에델과 어니스트>가 영화화되어 찾아왔다. 마치 옛 벗을 만나듯 레이먼드 브릭스의, 아니 레이먼드 브릭스 원작의 로저 메인우드 감독의 <에델과 어니스트>를 만나러 갔다.

비판적인 작가 레이먼드 브릭스의 c'set la vie

영화 <에델과 어니스트> 스틸 이미지

나와 가까운 사람, 하물며 나를 존재케 해준 부모가 살아온 삶에 대해 회갑연 상찬을 넘어선 '조명'은 쉽지 않다. 물론 그 반대의 부정의 경우도 있지만 '상찬'이든 '부정'이든, 나라는 존재의 감정적 찌꺼기를 거르고 부모 세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건 언제나 숙제이다. 그런 면에서, <에델과 어니스트>는 여운이 남는다. 극적이라서가 아니다. 마치 한 장 한 장 그림책을 넘기며 한 세대의 삶을 조감하는 심정으로, 그래서 결국에는 ‘나 역시도 이 분들처럼 역사를 뛰어넘지 못한, 한 세대로 인생을 살아가겠구나’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한다.

<에델과 어니스트>에 돌입하기 전에, 레이먼드 브릭스라는 작가에 대해 우선 배경지식을 쌓을 필요가 있을 듯하다. 즉, 그가 자신의 부모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봤는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이다. 흔히 소년과 눈사람의 겨울 한 철에만 존재하는, 조금은 쓸쓸한 우정에 대한 그래서 아름다운 동화책의 작가로만 우리는 기억하지만, 그의 작가적 세계는 생각보다 비판적이다.

1920년대 런던의 우유 배달부와 가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레이먼드 브릭스. 영화 속 그의 부모들이 전쟁과 자본주의의 급격한 발전을 겪으면서도 그들이 마련한 집에서 직업을 유지하며 나름 평생을 순탄(?)하게 보냈지만, 정작 레이먼드 브릭스는 그 자신에 대해 다르게 설명한다.

'세상에 대해 여러 고민을 해야 했던 가정환경과 성장 과정을 통해 대체로 난 우울하고 비관적이고 부루퉁해 있다. 언제나 세상 살기 괴롭다고 느껴왔고 나이 들수록 더 그렇게 느껴진다. 언제나 뚱해왔고 지금은 더 불만투성이다. 난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

그렇게 불만 많고 뚱한 그를 통해 표현된 세상은 그의 작품을 통해 드러난다. 전래동요 모음집인 <마더 구스>는 동요를 낭만적으로 그려내는 대신, 현대적인 배경에 노동 계층을 주인공으로 한 해학적인 해석을 곁들인다. 어린이와 작은 사람의 짧은 3일 간의 만남을 그려낸 <작은 사람>은 보는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육아에서 인간의 만남에 대한 상징적 이해로, <바람이 불 때에>에서는 핵전쟁이라는 세기말적 상황과 그에 대해 순진하리만치 성실한 노부부를 통해 세계사와 불가항력인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통해 역설적으로 '핵'의 위험성을 절실하게 경고하며 세상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해 왔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 그의 시간이 자신의 부모 세대를 그려낸 <에델과 어니스트>에서도 고스란히 관철된다.

보수당 지지자 에델과 노동당 지지자 어니스트 부부의 삶

영화 <에델과 어니스트> 스틸 이미지

1920년대 런던의 우유 배달부였던 어니스트는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길에 에델과 마주친다. 자신을 보며 씩씩하게 인사하는 청년 어니스트에게 호감이 갔지만, 늘 집주인의 닦달로 그와의 눈맞춤마저도 여의치 않았던 가정부 에델. 하지만 용감하게 그녀가 일하던 집의 문을 두드린 어니스트로 인해 그들의 만남은 이어질 수 있었다.

젊은 두 연인의 만남, 하지만 우유 배달부와 가정부였던 그들의 존재는 그들의 만남과 결혼마저도 규정한다. 당시 런던의 밤거리를 흥청이게 했던 파티 문화는 그들에게는 사치였으며, 결혼을 한 그들을 맞이한 건 흰 천으로 겨우 가린, 침대 하나 없는 20년 장기융자의 텅 빈 집이었다. 그래도 각자의 형제를 지난 1차 대전으로 잃은 그들은 살아남아 서로의 짝을 만난 건 다행이며 보장된 어니스트의 직업으로 가정을 꾸릴 수 있어 행복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성실함'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가정부로 일하다 뒤늦게 어니스트를 만나 결혼하게 된 에델은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고 싶다던 어니스트의 소망과 달리 레이먼드 단 한 명을 낳고 단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금발 머리를 자른다는 사실만으로도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아들을 귀히 여겼던 에델이었지만, 2차 대전 발발과 히틀러의 런던 공습은 이 부부로 하여금 전쟁을 피해 소중한 아들을 시골로 보내야만 하는 '이별'을 겪도록 만든다. 그들이 조금씩 꾸며 가꾸었던 집은 전쟁의 포화 속에 방공호가 되었고, 결국 전쟁의 참화에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삶은 여전히 이어져 갔다. 하늘이 맺어준 그들의 인연이 다하는 날까지.

영화 <에델과 어니스트> 스틸 이미지

이렇게 영화는 평범한 한 부부의 일생이라는 날실과 그 날실의 변화를 주도하는 역사적 사건,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을 통해 변화해 가는 부부의 삶을 관조적으로 그려낸다. 세계를 뒤흔든 전쟁은 그들의 일상을 변화시키지만, 그럼에도 우유배달조합의 성실한 직원이었던 어니스트와 알뜰한 에델은 전후 영국의 복지와 자본주의 발전의 '수혜자'가 되어 안정된 삶을 구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저 격동의 세월 속 객체로서 부부를 그려내지만은 않는다. 가정부 출신이지만 인생의 마지막 요양병원에 병문안 온 장발의 아들에게 빗을 건넬 만큼 깔끔했던 어머니 에델은 우유 배달부인 남편에게 왜 당신이 노동 계급이냐며 반문할 정도로 처칠을 비롯한 보수당 정부의 일관된 지지를 보였다. 그녀에게 어니스트와의 결혼 생활은 '노동계급'에서의 계층 상승을 보장해준 삶이었다.

그에 반해 늘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에 귀를 기울이던 남편 어니스트는 최저임금 결정안에 두 팔 벌려 환호할 정도로 노동 계급의 정체성에 충실했다. 때론 그가 지지했던 정책이 그의 신념을 당혹스럽게 할지라도. 그래도 그는 자전거에서 카트 그리고 자동차를 타며 은퇴할 때까지 '해직'의 위험 없이 가정을 지킬 수 있었다.

에델은 럭비를 하는 상류층 계급이 다니는 학교에 아들이 입학한 것에 자부심을 가졌고, 아들을 통해 그녀가 소망했던 계층상승의 꿈을 이루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 아들은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미술학교를 갔고, 손자를 안겨주는 대신 조현병의 아내와 아이도 없이 살아가야 했다. 부부는 하나뿐인 아들이 갸륵했지만, 그 아들은 금세 커서 부부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로 건너가 부모를 낯설게 했다. 결국 성실하게 살아내며 침대와 소파를 마련하고, 선물로 받던 석탄 한 줌 대신 보일러와 텔레비전의 문명을 겪어낸 부부였지만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채 병으로 이별을 맞이한다.

영화 <에델과 어니스트> 스틸 이미지

젊은 부부의 열의로 가득했던 집은 아들 레이먼드가 얻어온 배의 씨앗이 아름드리나무가 되도록 스위트 홈으로 여전했지만, 부부의 인생은 그 시간을 버텨내지 못한다. 그렇게 한 세대의 삶이 마무리되어간다.

영화는 레이먼드 브릭스의 부모를 통해 1,2차 대전을 경과하고, 전후의 복지국가 시대를 살아낸 세대의 삶을 조망한다. 그들은 부부였지만 각자 자신의 삶에 대한 주관은 달랐고, 그 주관과 다르게 국가의 정책과 문명의 발전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냈다. 그런 그들의 순응적인 태도 그 어디에서도 레이먼드 브릭스가 느꼈던 우울하고 비관적이었던 정경은 쉬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건 부모세대와 그 부모세대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자식 세대'의 간극일 터이다.

영화를 보면서 감회가 묵직해진 건, 전쟁을 겪으면서 각자 다른 정치적 입장임에도 '부부'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낸 그 시간 다른 공간을 살았던 부모 세대를 둔 자의 회한이다. 우리네 부모들은 에델과 어니스트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다른 정치적 입장이 그들의 생사를 갈랐으며, 그들이 순응의 대가로 누렸던 '안정된 삶'을 얻기 위해 처절한 자기희생과 노력을 곁들여야 했다. 이미 선진국인 국가의 국민과, 개도국의 운명이란 다른 삶의 길을 걷게 했던 지난 시기에 대한 투영이 <에델과 어니스트>에 대한 감상을 묵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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