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정상회담의 날짜와 장소까지 결정되자 회담이 열리기도 전에 북한은 억류 한국계 미국인 3명을 풀어주고, 풍계리 핵실험장도 자진해서 폐기하겠다며 외국 기자단 초청 계획을 밝혔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만 풀려가는 것만 같아 오히려 불안한 감도 없지 않았다. 개인 간의 사이도 싸웠다 화해하려면 이런저런 문제가 걸리기 마련인데, 70년을 넘게 으르렁대던 북미 간의 화해가 너무 쉽다 싶었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북미정상회담까지 가기로 한 속사정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은, 북한의 비핵화 스케줄에는 적어도 핵무기에 대한 당당한 자신감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리비아와도 다르고, 이란과도 다른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북한이 실명 비판한 존 볼튼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주장해온 리비아식 비핵화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생화학무기까지 포함하자는 등 북한이 넘어올 문턱을 높이는 발언들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합성한 사진. [AFP=연합뉴스]

북한이 16일 미국과 남한을 향해 돌연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일단 미국은 ‘리비아식이 아닌 트럼프식’이라며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보장에 대한 교환의 문턱을 일단 낮추는 모습이다. 북미정상회담에 있어 결정권자는 존 볼턴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은 일단 리비아식의 강요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북한이 강경한 입장을 보이면서도 수위를 조절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 달래기에 나선 미국이 완전히 저자세를 취할 것을 기대하는 것도 금물이다. 당연히 이제 관건은 백악관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트럼프식’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북한과 미국 사이의 핵심 의제에 대한 줄다리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거나, 그럴 단계에 왔음을 의미한다.

북미정상회담은 북한도, 미국도 절실한 이유를 안고 시작되었다. 다가올 11월의 미국 중간선거는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여부를 가늠할 지표가 될 것이기에 북미정상회담에서 노벨평화상으로 이어질 정도의 성과가 필요하고, 오랜 대북제재로 경제가 이미 파탄 난 북한으로서는 그보다 더 절실한 생존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잡음이 난다고 쉽게 깨질 것은 아니지만 워낙 서로 신뢰의 이력이 없기 때문에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날짜와 장소가 정해진 북미정상회담이라지만 현재로서는 낙관도 비관도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그런 까닭에 애초 북미 간에 다리를 놓아주었던 남한의 역할, 다시 말해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로 향하는 운전대를 쥔 문재인 대통령의 조정역이 더욱 무거워지게 된 것이다. 청와대는 17일 “정부와 문재인 대통령이 더 적극적인 중재자 역할에 나설 것”이라고 밝힌 것도 그런 맥락에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 27일 오후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대화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지난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로 설치된 남북 정상 간의 핫라인 가동일 것이다. 아직 공식적으로 양측의 핫라인 통화 사실은 전해진 바 없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양 정상 간의 통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한다. 북한이 사실상 북미 간의 갈등에 애써 남북문제를 결부시킨 것의 의미는 문재인 대통령의 적극적 조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어려움도 반드시 해결해낼 것이다. 세계가 그에게 붙여준 ‘그레이트 네고시에이터’의 능력과 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평화를 지켜낼 것이라는 그의 진정성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대안일 수밖에 없다.

북미 간의 조정 역할이라면 정부와 문재인 대통령이 마다할 역할은 아니다. 다만 또 다른 문제는 북한이 말한 “북남 고위급회담을 중지시킨 엄중한 사태”의 해결이 필요하다. 이 ‘엄중한 사태’는 며칠 전부터 실시하고 있는 맥스선더 훈련과 자유한국당의 초청으로 국회에서 강연한 태영호 전 공사를 지목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이런 상황에서 북미정상회담을 더욱 강경한 내용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겠다고 나선 것에 대해 경거망동이라는 비난여론이 높다. 자유한국당의 공개서한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무게 있게 대하지도 않겠지만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분노하게 된다. 자유한국당이 말한 것처럼 앞서 태영호 전 공사의 강연은 ‘헌법상의 자유’이고 공개서한을 보내는 것도 정당의 자유겠지만, 분단의 과거를 딛고 평화와 번영을 기약하는 ‘세기의 회담’을 앞둔 지금이라면 분명 자중할 필요가 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또 올 거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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