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던 남아공월드컵 결승전. 또 한 번 지난 월드컵에 이어 승부차기로 가는 것 아니냐는 예상을 하고 있는 가운데서 드디어 연장 후반 11분, 스페인의 안드레스 이니에스타가 골을 성공시키며 경기장은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이니에스타는 기다렸다는듯이 위에 입고 있던 유니폼을 벗고, 언더웨어 셔츠를 당당하게 내밀면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 셔츠에는 어떠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고 이 내용을 알아차린 순간 많은 축구팬들은 환호와 더불어 감동적인 느낌을 받기 시작합니다. 'DANI JARQUE SIEMPRE CON NOSOTROS'(다니엘 하르케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한다)'

비록 '유니폼 상의를 벗었다'는 규정으로 경고를 받은 이니에스타였지만 그는 충분히 자신의 할 일을 다 하고 잊혀져가던 동료를 다시 한 번 이름으로나마 일으켜 세우면서 흥분과 감동을 동시에 많은 축구팬들에게 선사했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나타난 어떤 골 뒷풀이보다도 정말 임팩트가 강했던 이 모습에 저도 역시 상당한 감동과 충격을 받았고, 축구가 정말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걸 강하게 느꼈습니다.

이니에스타가 언더웨어 셔츠에 새긴 다니엘 하르케는 스페인 청소년 대표를 통해 무럭무럭 성장해 가면서 스페인 축구에서 중심에 설 수 있는 선수로 주목받았습니다. 바르셀로나를 연고에 둔 에스파뇰 팀에서 뛰면서 어떻게 보면 이니에스타와 라이벌 관계에 있을 법도 했겠지만 하르케와 이니에스타는 오히려 같은 연고를 둔 팀을 뛰면서 나이도 비슷해 매우 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 친구 다니엘 하르케를 추모하는 메시지를 새긴 셔츠를 입고 골 뒷풀이를 펼치는 이니에스타 ⓒ연합뉴스
그렇게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중심으로 거듭나던 하르케였지만 지난해 8월, 프리시즌 이탈리아 투어 도중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숨지면서 스페인 축구계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 있는 선수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하르케를 추모했고, 훗날 알고 보니 그의 여자친구는 임신 7개월째였던 것으로 드러나며 아쉬움을 더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죽음은 늘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잊혀지는 법이지요. 월드컵에 몰두하면서, 또 리그 성적을 위해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하르케의 죽음은 서서히 잊혀져 갔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니에스타는 늘 하르케를 가슴 속에 품고 있었고, 언젠가는 하르케를 다시 알릴 기회를 얻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중요한 순간인 월드컵 결승전에서 그것도 극적으로 골을 성공시키면서 기회를 얻었고, 그는 누가 뭐래도 당당하게 친구의 '마음 속 존재'를 다시 한 번 일깨우면서 팬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이니에스타의 골 뒷풀이를 보면서 문득 7년 전인 지난 2003년, 카메룬의 비비앙 푀가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숨졌을 때가 기억나기도 했습니다. 당시 카메룬의 주축 선수로 맹활약했던 푀는 프랑스에서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 준결승전에서 경기 도중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그러나 심장마비로 인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고, 카메룬 팀은 결승에 오르고도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경기 자체를 제대로 치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카메룬은 기어이 결승전에 모습을 드러냈고, 상대팀이었던 프랑스는 푀를 진심으로 추모하며 역시 경기에 나섰습니다.

▲ 친구 다니엘 하르케를 추모하는 메시지를 새긴 셔츠를 입고 골 뒷풀이를 펼치는 이니에스타
그리고 마침내 티에리 앙리가 골을 성공시켰을 때 프랑스 선수들은 한데 모여 기쁨을 표하지 않고 손을 하늘로 가리키며 푀의 죽음을 애도하는 골 뒷풀이를 펼쳤습니다. 상대팀이기는 했어도 이들은 같은 축구 선수로서 열정을 다한 선수 동료에게 마지막 추도의 메시지를 바치며 두 팀은 물론 세계를 감동시켰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프랑스와 카메룬 선수들은 한데 모여 푀의 죽음을 추모했고, 관중들은 잔잔한 분위기 속에 역시 동참하는 모습을 보이며 하나의 감동적인 경기 장면을 연출해 냈습니다.

독일의 차세대 주전 골키퍼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로버트 엔케의 죽음은 독일 축구계를 너무나도 안타깝게 했습니다. 하나뿐인 딸이 선천적인 질환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이를 너무나도 슬퍼했던 엔케는 지난해 11월,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꽤 실력 있는 선수였고, 개인사가 너무 안타까워서 독일 축구계는 그야말로 슬픔과 충격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엔케를 잊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엔케의 소속팀이었던 하노버 96은 이번 시즌 최종전이 끝난 뒤 'ROBERT R.I.P'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경기장을 돌며 그를 추모했고, 국가대표팀 역시 평가전에서 엔케가 직접 입었던 유니폼을 정성껏 정리해서 자리를 마련해 경기가 끝날 때까지 놓는 등 그를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동료의 죽음을 마치 내 가족이 입은 것처럼 안타까워하는 선수들의 마음은 그렇게 하나같았습니다.

언론 보도 때문에 사생활이 문란하고, 개인주의에 휩싸인 축구선수들이 많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똑같이 정을 느끼는 사람이고 어떻게 보면 순수한 면을 더 느낄 수 있는 면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이니에스타의 골 뒷풀이를 지켜보면서 축구 선수들이 정말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런 면이 축구뿐 아니라 스포츠 전체를 더욱 빛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봤습니다. 한 나라의 사회를 통합시키고, 나아가 인류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해내는 축구가 사랑과 우정을 느낄 수 있는 스포츠라는 것을 이번 월드컵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했다는 점에서 이니에스타의 골 뒷풀이는 그 어떤 골 뒷풀이보다도 값지고 의미 있고 멋지고 또 아름다웠습니다.

대학생 스포츠 블로거입니다. 블로그 http://blog.daum.net/hallo-jihan 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스포츠를 너무 좋아하고, 글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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