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한 달을 뜨겁게 달궜던 남아공월드컵이 스페인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치안 불안, 잇따른 스타들의 부상으로 인한 불참으로 흥행과 거리가 먼 월드컵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지만 조별 예선에서 토너먼트로 넘어가면서 오히려 명승부에 버금가는 장면들이 잇따라 나오면서 많은 축구팬들을 열광케 했습니다. 그 덕분에 남아공월드컵은 예상을 뒤엎고 역대 최다 관중 3위에 해당하는 320여 만 명이 경기장을 찾아 '흥행한 월드컵'으로 기억에 남게 됐습니다. 사상 첫 아프리카 월드컵은 그렇게 성공적인 월드컵이 됐습니다.
한 달 동안 전세계를 흥분하게 만든 만큼 여러 가지 각종 명장면들도 많은 축구팬들을 설레게 했습니다. 우리가 이번 남아공월드컵을 기억하면서 꼭 잊지 말아야 하는 명장면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축구의 사상 첫 원정 16강 위업
뭐니뭐니 해도 한국 축구 입장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명장면을 꼽는다면 단연 한국 축구의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 달성일 것입니다. 그리스와의 조별 예선 1차전에서 이정수, 박지성의 연속골로 2-0 완승을 거둔 한국은 2차전 아르헨티나전에서 무기력한 경기를 벌인 끝에 1-4로 대패해 좌절을 맛봤다가 나이지리아와의 최종전에서 2-2 무승부를 거두고 기사회생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원정에서 16강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해냈습니다. 비록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 루이스 수아레즈에 결승골을 내주면서 1-2로 아깝게 패했지만 마지막까지 선전을 펼친 태극전사들의 투혼에 많은 사람들은 아낌없는 박수와 격려를 보냈습니다.
진화한 기술력, 강해진 조직력, 그리고 무엇보다 어느 팀이든, 어떤 상황에서든 목표를 이루기 위한 강한 의지와 자신감은 한국 축구를 더욱 강하게 만든 원동력이 됐고, 이는 월드컵 두 번째 16강이라는 쾌거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약속했던 것을 지켜내기 위해 23명의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모두가 이뤄낸 이 쾌거는 한국 축구사(史)에도 오래 남을 위업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지난 1966년 이후 44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이름을 올린 북한 팀의 출전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뭐니뭐니 해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는다면 바로 스트라이커 정대세가 브라질전을 앞두고 있었던 국가 연주에서 눈물을 흘렸던 장면일 것입니다. '세계 최강팀과 월드컵에서 맞붙은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이유로 국가 연주 시간에 눈물을 흘린 정대세는 비록 이번 월드컵에서 골을 넣지 못했지만 인상적인 몸놀림과 공격력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며 독일 분데스리가 2부 보쿰으로 이적하는 개인적인 성과도 이뤄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고, 언제나 '우리는 하나'를 외치고 싶다는 이 선수에게 우리는 앞으로도 깊은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결승전에서 스페인은 네덜란드와 손에 땀을 쥐는 팽팽한 승부를 벌이다 연장 후반 11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의 회심의 결승골에 힘입어 사상 첫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골을 넣은 뒤 이니에스타는 곧바로 입고 있던 유니폼 상의를 벗고 안에 입던 러닝 셔츠에 적힌 메시지를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 메시지는 바로 지난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옛 대표팀 동료 다니엘 하르케를 추모하기 위한 '우정의 메시지'였습니다. 비록 상의를 벗어던졌다는 이유로 경고를 받기는 했지만 훈훈하고 감동적인 이 골 뒷풀이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를 만큼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기기에 충분했습니다. 남아공월드컵이 골 뒷풀이가 재미없다는 말이 많았지만 개막전에서 개막골을 터트린 시피웨 차발랄라(남아공)의 특이한 골 뒷풀이와 마지막 경기 결승전에서 이니에스타의 골 뒷풀이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에 남았습니다.
독일 축구의 아름다운 변신
그동안 독일 축구는 '재미없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조직력이 좋고 짜임새가 있다고 하지만 '이기는 축구'에만 신경쓰다보니 화끈하고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에서는 '젊은 피'를 중심으로 기술적이고 화려한 공격력을 자랑하면서 3-4위전까지 모두 7경기를 치르는 동안 16골을 넣는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득점왕에 오른 토마스 뮐러, 새로운 중원사령관 메수트 외질은 이번 대회를 통해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고, 지난 월드컵에서 가능성을 보여줬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루카스 포돌스키, 필립 람은 한층 더 진화한 기량으로 독일 축구의 진정한 중심으로 거듭나며 힘을 보탰습니다. 4년동안 온갖 비판과 지적 속에서도 꿋꿋하게 이겨내며 정상급 팀을 만들어낸 요아힘 뢰브 감독은 잘 생긴 외모로도 관심을 끌며 '인기남' 대우를 받기도 했습니다. 비록 준결승에서 스페인에 져 아쉽게 탈락했지만 독일 축구는 잉글랜드, 아르헨티나 등 라이벌 강호들을 상대로 4골을 넣으면서 '충격'에 가까운 대승을 이끌어내며 그야말로 아름답고 완벽하게 변신에 성공했습니다. 충분히 이번 월드컵 최고의 팀으로 각광받을 수 있을 만큼 돋보였던 전차군단이었습니다.
1930년 초대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우루과이 축구의 화려한 부활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당초 16강에만 올라도 잘 한 것이라고 예상할 만큼 남미팀 임에도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던 우루과이는 탄탄한 공-수 전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조별 예선 1위로 통과한 뒤 8강에서 가나를 꺾고 40년 만에 4강에 올라 '남미를 대표하는 팀'으로 다시 거듭났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루이스 수아레즈가 손으로 가나의 슈팅을 막아내 퇴장당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강한 팀 정신으로 목표를 달성해 내면서 '돌풍의 팀' 면모를 과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돌풍의 중심에는 '골든볼' 디에고 포를란이 있었습니다. 한때 맨유에서 버림받는 선수였던 31살의 포를란은 이번 월드컵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골을 뽑아내 5골을 집어넣으며 '불꽃 투혼'을 보여줬습니다. '원맨팀'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조국의 부활을 위해 거의 전경기 풀타임을 뛰며 투혼을 보여준 포를란의 활약은 충분히 박수를 보낼 만 했습니다.
버저비터 골, '남아공의 기적' 선보인 미국 축구
경기 종료 직전 터지는 골로 운명이 엇갈린다면 이보다 더 짜릿한 순간은 없을 것입니다. 미국 축구는 이번 월드컵에서 그 유명한 '버저비터 골'로 8년 만에 16강 진출을 이뤄내며 크게 환호했는데요. 조별 예선 3차전 알제리와의 경기에서 종료 직전, 조지 알티도어의 슈팅이 골키퍼 맞고 나온 것을 랜든 도너번이 쇄도해 들어가며 오른발로 득점에 성공, 1-0 승리를 거두고 16강에 올랐습니다. 같은 시각, 다른 곳에서 잉글랜드와 경기를 벌이고 있던 슬로베니아는 다 잡은 16강 티켓을 놓치며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골 하나에 정말 제대로 울고 운 미국, 슬로베니아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전 경기에서 오심으로 힘겨운 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명백한 골을 골로 인정받지 못하고 파울 판정도 불리하게 받으면서 답답해 했습니다. 이렇게 이번 월드컵에서 심판들의 오심으로 경기가 뒤집어진 경우가 많아 문제가 됐습니다. 대표적으로 16강전 잉글랜드-독일 경기에서 잉글랜드의 프랭크 람파드가 날린 슈팅이 크로스바를 맞고 골라인을 그대로 통과했음에도 노골로 선언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 1-2로 뒤지고 있어 이 골이 들어갔더라면 승부는 어떻게 될지 모르고 있었지만 이 오심으로 승부의 추는 완전히 기울어지고 독일의 대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조별 예선보다 토너먼트에서 의외의 오심이 자주 나타나는 등 문제가 끊이지 않자 국제축구연맹(FIFA)은 대응책을 마련하겠다고 하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스타군단 답지 않게 씁쓸하게 퇴장한 우승 후보들
많은 전문가, 도박사, 팬들의 예상대로 스페인의 우승이 확정됐지만 의외로 많은 강호들이 일찌감치 탈락하며 부진한 것은 눈에 띄었습니다. 프랑스는 그야말로 '오합지졸' 군단의 극치를 보여주며 1무 2패로 씁쓸하게 퇴장했고, 전대회 챔피언 이탈리아는 우승 감독 마르첼로 리피를 감독 자리에 앉혔음에도 이렇다 할 특유의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며 2무 1패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밖에도 잉글랜드는 팀내 분열, 선수의 팬 모독 등으로 실망스러운 모습을 잇따라 보여주며 16강에만 만족하는 아픔을 맛봤습니다. 스타군단 답지 않은 전략 실종과 전력 저하는 '월드컵 실패'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미운 정' 제대로 든 부부젤라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응원을 꼽는다면 단연 '윙-윙-'대는 소리가 인상적이었던 부부젤라 응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TV가 고장난 줄 알았다', '경기에 집중 안 되게 왜 이러느냐'면서 비난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지만 1달이 지나놓고 보니 이제는 축구 경기에 부부젤라 소리가 안 나면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미운 정'이 제대로 든 사람들이 많아진 분위기입니다. K-리그에서도 일부 부부젤라가 도입됐던 가운데서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이는 등 부부젤라에 대한 전세계의 관심은 이번 월드컵에서 만국 공통과도 같았습니다.
월드컵 경기만큼이나 뜨거운 이른바 '장외 월드컵'은 이번 월드컵을 더욱 흥미롭게, 재미있게 만든 요소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돋보였던 것은 '징크스', 그 중에서도 '독일 문어의 예측'이 전세계적으로 주목받았습니다. 독일의 한 수족관에 전시돼 있는 독일 문어 파울은 이번 월드컵 독일대표팀 경기 승패를 모두 맞힌데 이어 결승전 승부마저 적중하면서 일약 유명 인사가 됐습니다. 반면 '축구 황제' 펠레는 또 한 번 결승전을 빼고 자신이 예측했던 모든 팀이 떨어지면서 '펠레의 저주' 위력을 새삼 느꼈습니다.
국내에서는 '차두리 신드롬'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월드컵 전,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드리블을 하면서 여러 선수들을 쉽게 쓰러뜨리면서 '차미네이터'라는 별칭을 얻었던 차두리는 본선에서 인상적인 활약으로 축구팬 다수의 관심을 받으며 신드롬급 인기를 구가했습니다. 차두리의 아버지 차범근 해설위원이 이번 월드컵에서도 해설을 하면서 이래저래 많은 관심을 받은 가운데서 한동안 잊혀 질 뻔 했던 차두리의 부활은 많은 팬들에 흥미로우면서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월드컵은 전세계를 웃고 울렸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축구를 통해 세계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느꼈다는 것입니다. 사상 처음 아프리카에서 열린 월드컵은 그런 의미에서 어떤 월드컵보다도 더욱 인상에 남았고,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월드컵으로도 기억될 것입니다. 다음 4년 뒤, 2014년에 브라질에서 열릴 월드컵에서는 또 어떤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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