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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뿐인 방송계 갑질 논란[기자수첩] 변한 것 없는 방송계 '을'에게 시작점이 필요하다
윤수현 기자 | 승인 2018.05.03 16:33

[미디어스=윤수현 기자] 방송계 갑을 논란은 예전부터 있어왔다. 기형적인 제작현장 구조 때문이다. 제작현장에서 ‘정규직’ CP와 PD는 모든 의사결정 과정의 꼭대기에 있다. 제작 일정, 스태프 고용, 임금 계산 등 모든 과정은 본사 PD를 통해 결정된다. 그를 중심으로 프리랜서 PD, AD, FD, 작가, 장비 인력 등의 인력이 수직적으로 나열된 구조다. 이들 중 상당수는 프리랜서다. 따라서 현장에서 정규직 PD는 ‘갑 중의 갑’이 된다. 그의 말 한마디에 일정이 바뀌고 사람이 바뀐다. 정규직 PD 눈 밖에 나면 그날로 짐 싸고 제작현장을 떠나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당장 현장을 떠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스태프의 능력은 객관적인 지표로 나타나기 힘들다. PD와 CP가 내리는 평판, 추천 등이 다음 일거리를 결정한다. 아마 PD의 눈 밖에 난다면 적어도 해당 방송국의 일거리는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프리랜서 스태프는 참고 살았다. 종종 언론 보도를 통해 제작현장의 불공정함이 드러나긴 했지만 금방 휘발됐다. ‘내가 제보하고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도 뭐가 달라질까’라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갑들이 조성한 분위기였고, 생살여탈권을 빼앗긴 ‘을’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고 박환성·김광일PD 사망사고’와 한겨레21의 ‘상품권 페이’ 보도가 나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비정상적이지만 당연하게 생각되었던 관행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대중은 분노했다. 언론도 이에 편승했다. ‘일부 방송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사가 방송계 갑질을 취재했다. 실제 사례도 많이 드러났다. 아래의 기사 등이 대표적이다.

(관련기사 ▶ 어떤 막내 방송 작가들의 6주)
(관련기사 ▶ '방송의 얼굴' 프리 아나운서에게 계약서란?)
(관련기사 ▶ tvN 윤식당 엔딩 자막의 프리뷰어는 누굴까)
(관련기사 ▶ 프리랜서 방송작가 향한 tbs PD의 갑질)
(관련기사 ▶ 연합뉴스TV에서 벌어진 성추행 2차 피해 사례)

방송계 갑질에는 ▲정규직 PD나 직원이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갑질을 일삼으며 ▲정작 가해자는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등의 특징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대부분 가해자는 정규직 직원 혹은 PD였고 피해자는 프리랜서였다. 가해자는 “관행이에요”·“그게 싫으면 나가면 되죠” 등의 반응을 보인다.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자신의 갑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정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싫으면 나가지 왜 일했어?”라는 논리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갑질은 관행이었다. 이를 버티지 못하면 나약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특히 프리랜서에게 가해지는 갑질은 피해가 극심했다. 법적으로 프리랜서는 노동자가 아니다. 따라서 노동법이나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당장 해고가 된다고 해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일을 찾는다'는 프리랜서의 본 취지는 방송계에서 “갑질 당해도 아무 말 못하는"존재로 변해있었다.

(게티이미지뱅크)

갑질에 대한 문제 제기는 쉽지만 해결 방법은 찾기 힘들다. 정규직 직원의 의식 개선은 추상적인 대안일 뿐이다. PD들은 처음 입사할 때부터 선배들의 ‘갑질’을 봐왔고, 일부 ‘갑질 PD’는 이를 체화시켰다. 갑질을 문제라고 인식하는 PD들이 드문 상황에서 자체 정화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모든 방송 스태프에게 적용되는 표준계약서를 만들고 법적으로 의무화하는 방안도 있다. 하지만 당장 효과를 보기는 힘들다. 방송작가의 표준계약서를 만들기 위해서 걸린 노력과 시간을 고려했을 때 모든 직종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십수 년이 걸릴 수 있다. 이미 만들어진 방송작가 표준계약서가 방송국에서 범용으로 쓰이기 위해서도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사이 ‘갑질’을 당하고도 참을 수밖에 없는 제작현장의 ‘을’들을 생각한다면 더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방송계갑질119’가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조합 창립을 시도하고 있다. 준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긍정적인 방향이다. 방송 제작현장 전반에 퍼진 문제점 해결을 정부나 방송국에 맡기기엔 한계가 많다. 비정규직 노조가 만들어진다면 '을'들이 직접 문제의 원인부터 지적할 수 있는 바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노조는 생살여탈권 때문에 침묵하고 있었던 ‘을’에게 힘을 준다. 개인적 차원의 문제 제기를 넘어서 노조가 목소리를 낸다면 방송사도 이를 무시할 수 없다. 프리랜서·계약직 신분의 노동자들이 노조의 보호를 받게 된다. 김혜진 방송계갑질119 스태프는 “노동조합 창립이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김혜진 스태프는 “영화 촬영이나 건설현장의 경우 계약서가 있어 노동조건을 확보하고 있다”며 “다양한 직종이 함께 있는 이들이 교섭을 통해 협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동조합에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방송계 비정규직을 위한 법과 제도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개별 대응은 한계가 있다”며 “노조를 통해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근본적인 제도개선이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방송계 갑질 해결 방안’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이제는 시스템의 변화가 해답이다. 갑질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제작현장의 관행을 고쳐야 한다. ‘을’들의 시각으로 말이다. 방송계 비정규직 노조가 그 시작이 될지 ‘갑과 을’이 지켜보고 있다.

윤수현 기자  melancholy@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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