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월드컵 당시 개인적으로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 경기 가운데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경기 중 하나를 꼽는다면 바로 독일-사우디 아라비아의 경기였습니다. 우선 '월드컵에서 이런 스코어가 나올 수 있나'하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점수, 8-0이라는 스코어가 가장 기억에 남지만 헤딩으로만 해트트릭을 기록한 한 독일 선수의 '깜짝 등장'도 눈길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깔끔하게 득점을 기록하고 '백 텀블링'을 하면서 유쾌하게 골 세레모니를 한 이 독일 선수에 저는 엄청난 매력을 느꼈고, '가장 좋아하는'은 아니어도(^^;) '꽤 좋아하는' 축구 선수 가운데 한 명으로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 선수는 자국에서 열린 다음 월드컵에서 5골로 득점왕에 올랐고, 또 그 다음 월드컵에도 출전해 4골을 집어넣으며 월드컵 통산 최다 골 기록 2위까지 올라섰습니다. 이 선수는 바로 '헤딩 머신'에서 '전천후 득점 기계'로 떠오른 독일 공격수 미로슬라프 클로제(바이에른 뮌헨)입니다.

클로제는 이번 2010 남아공 월드컵 8강전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2골을 뽑아내며 월드컵 통산 14골을 기록, 독일 축구의 전설 가운데 한 명인 게르트 뮐러의 기록과 동률을 이뤘습니다. 이미 펠레(브라질,12골), 쥐스텐 퐁텐(프랑스,13골)의 기록을 넘어선 클로제는 독일 선수 그 누구도 깨기 힘들 것으로 예상됐던 뮐러의 기록과도 같아지면서 독일 축구 공격수의 새로운 전설로 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비록 마지막 경기, 3-4위전에 등부상으로 출장이 어려워졌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호나우두의 기록을 넘어서는 것은 사실상 어려워졌지만 클로제의 기록은 다른 어떤 선수보다도 참 대단하고 위대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클로제는 이번 월드컵에서 4골을 기록하면서 3개 대회 연속 득점을 기록한 역대 20번째 선수가 됐습니다.(19번째 선수는 바로 '캡틴박' 박지성이었지요) 하지만 최다 득점 기록 순위권에 있는 선수, 그리고 3개 대회 연속 득점을 기록한 선수 가운데서 꾸준하게 5골-5골-4골을 기록한 선수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클로제가 꾸준하게 자기 관리를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통산 12골을 넣은 펠레는 1958 월드컵에서 6골을 넣었을 뿐 1962, 66 월드컵에는 1골씩 넣는데 그쳐 다소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였고,(물론 당시 펠레에 대한 집중적인 견제가 어느 정도 원인이 됐지만 말입니다) 13골의 쥐스텐 퐁텐은 1962 월드컵에서 넣은 기록이 전부였습니다. 또 1974 월드컵에서 7골을 넣은 득점왕인 폴란드 선수 라토 역시 1978, 82 월드컵에서 2골, 1골에 그친 바 있었습니다. 그나마 클로제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위르겐 클린스만 정도가 3골-4골-3골(1990-94-98년)을 집어넣어 꾸준하게 골맛을 봤던 정도를 제외하면 클로제의 기록은 자기 관리의 상징과도 같은 면에서 대단히 가치 있어 보입니다.

클로제가 넣은 상대팀들이 어느 대륙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도 돋보입니다. 그는 유럽(아일랜드, 잉글랜드), 남미(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북중미(코스타리카), 아시아(사우디 아라비아, 호주), 아프리카(카메룬) 등 전 대륙을 상대로 고르게 득점을 기록하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습니다. 사실 2002 월드컵 때는 조별 예선에서만 득점 기록을 이어가 아쉬움이 많았지만 2006, 2010 월드컵에서 토너먼트에서도 득점 기록을 이어갔다는 점은 나름대로 큰 경기에서도 제 몫을 다 해줬다는 면에서 순도 있는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머리로, 또는 발로 어떻게든 골을 뽑아내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양 발을 자유자재로 쓰는 클로제는 놀라운 점프력과 동물적인 슈팅 타이밍을 갖춘 특급 골잡이로서 A매치 101경기에 출전해 무려 52골을 넣는 저력을 발휘했습니다. 현대 공격수들이 다재다능함을 갖춰야 하는 가운데서 거의 표상과 같은 활약과 기록을 보였다는 점은 클로제가 2000년대 위대한 선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것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골을 뽑아내야 하는 공격수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클로제의 활약상은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웬만한 축구팬들은 잘 알겠지만 그가 불과 10년 사이에 세계적인 골잡이로 거듭난 입지적인 선수라는 것도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클로제는 1987년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한 뒤, 아마추어 팀을 전전했던 '대단히 평범한 선수'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다 카이저슬라우테른 2군 코치의 도움으로 1999년 카이저슬라우테른 아마추어팀에 힘겹게 들어갔습니다. 그랬던 그가 3년 만에 독일 대표에 발탁돼 득점 2위를 기록했는가 하면 2004년 베르더 브레멘으로 이적한 후 첫 시즌에서 15골을 뽑으며 성공가도를 달렸고, 2007년 독일 최고 클럽팀인 바이에른 뮌헨까지 입성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개인이 잘 되는 것에만 집착하고 그 때문에 자기 관리가 잘 되지 않는 유럽 선수들이 많은 것을 생각했을 때 클로제는 찬찬히 단계를 밟아나가며 마침내 최고 반열에 오른 케이스로 유럽 축구에 적지 않은 반향을 또 한 번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됩니다.

비록 이번 일요일(11일) 새벽(한국시각)에 있을 월드컵 3-4위전에는 출전하지 못하는 클로제.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일지 몰라도 왠지 다음 4년 뒤, 브라질에서도 그가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드는 건 그가 매년마다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나 생각됐습니다. 전설과도 같은 통산 14골 기록을 이어 다음 월드컵에서도 또 한 번 활약하며 4개 대회 연속 득점, 최다 골 기록 경신을 하는 '위대한 클로제'의 모습을 꼭 한 번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만약 그때도 골을 넣는다면 '백 텀블링'하는 클로제 특유의 세레모니도 꼭 한 번 또 봤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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