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는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해서 바야흐로 2라운드로 들어섰다.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완전한 비핵화’ 의사를 거듭 밝히면서 공은 북미정상회담의 키를 쥐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보수언론 등은 여전히 북한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비핵화 협상의 지난한 과정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의 마음이 바뀔 가능성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는 과거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이를테면 보수언론이 반복해서 상기하는 영변 냉각탑 폭파의 논리를 보자. 2008년 6월 북한이 9.19 공동성명의 이행 의지를 밝히기 위해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한 것에 대해 당시 미국 온건파의 입장을 자처한 크리스토퍼 힐 전 미 국무부 차관보는 해당 조치가 자신의 제안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이를 근거로 딕 체니 부통령 등 강경파를 제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9.19 공동성명의 파기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이 결정적이었지만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 등 미국 내 강경파의 책임이 없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수세력은 이 모든 맥락을 뭉뚱그려 영변 냉각탑 폭파를 북한의 기만전술 정도로 단순화 하는 일을 반복해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풍계리 핵 실험장 폐기(혹은 폐쇄)를 놓고 나름의 항변을 내놓은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청와대는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에서 폐기 대상인 핵 실험장에 대해 “기존 실험 시설보다 더 큰 두 개의 갱도가 더 있고 이는 아주 건재하다”고 발언한 사실을 공개했다. 과거 영변 냉각탑처럼 사실상 쓸모없는 시설을 보여주기 식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북한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통해 사실상 핵 실험 등의 동결을 공식화했고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판문점 선언을 관영매체를 통해 거의 그대로 보도하도록 했다는 점에서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발언을 ‘거짓말’로 볼 이유가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판단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현지시간 29일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직접 방북해 확인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현지시간 28일 미국 미시간주에서의 연설에서 낙관에 찬 메시지를 반복해서 내놓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7일 오후 판문점 평화의 집 앞에서 판문점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분위기가 달갑지 않은 보수세력은 중간선거와 재선을 위해 성과가 급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불완전한 비핵화와 체제 보장을 맞바꾸는 ‘빅딜’을 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물론 그런 가능성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원내의 공화당을 중심으로 미국 내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죽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 내 언론 대다수의 반응도 판문점 선언에 드러난 북한의 비핵화 입장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낙관론을 경계하는 쪽에 가깝다.

‘네오콘 이데올로그’로 잘 알려진 존 볼턴 백악관 NSC보좌관은 현지시간 29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비핵화 해법에 대해 “리비아모델을 상당히 염두에 두고 있지만 분명히 차이는 있다”고 했다. 여전히 핵 폐기를 보상의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본다는 것이다. 다만 존 볼턴 보좌관은 “회담에 드라이버 세트를 갖고 가서 다음날부터 (핵 시설 등을) 분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면서 이행에 일정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향후 비핵화와 관련한 1차 관문은 수단과 일정이란 면에서 북한과 미국이 합의에 도달할 것이냐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남북정상회담의 판문점 선언은 북한이 여전히 미국이 예상할 수 있는 범주 내에 있다는 판단을 가능케 한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 일정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특별사찰’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비핵화 검증을 수용할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판문점 선언에는 연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포함돼있다. 북미정상회담 이후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전환 추진을 위한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 정상회의가 추진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사이에 북한이 미국과의 합의 이행을 위한 진정성 있는 조치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한다. 이는 미국이 상정하고 있는 ‘일괄타결 후 단기간 내 후속조치 완료’의 로드맵과 궤를 같이 한다.

물론 북미정상회담의 결과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 북미관계는 민족주의적 당위에 기댄 통일의 필요성이라는 공통적 인식을 갖고 있는 남북관계와는 또 다르기 때문이다. 북미정상회담이 만에 하나 잘못될 경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일은 막아야 한다. 그러므로 국회가 판문점 선언을 비준하는 것도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청와대 참모진에게 남북정상회담 합의 내용의 국회 비준 준비를 지시한 것의 배경에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있다.

현재 국회 상황은 나쁘지 않다. 더불어민주당과 민주평화당, 정의당은 판문점 선언의 국회 비준에 긍정적이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사실상 국회 비준을 반대하고 있다. 바른미래당은 북미정상회담까지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유보적 입장에 머물러있다. 다만 바른미래당 내에서 사실상 범여권과 행보를 같이 하는 의원들과 나름의 소신을 내세우는 하태경 의원 등까지 합치면 원내 다수는 판문점 선언의 국회 비준에 긍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남북의 정상이 공동으로 선언한 내용을 국회가 표 대결로 처리하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이 좋지 않다. 자유한국당은 아니더라도 바른미래당 정도는 설득이 가능한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일각에서는 ‘드루킹 특검’과 맞바꿀 가능성도 언급되는데 흥정을 하듯 할 것은 아니지만 굳이 명분을 따지자면 못할 일도 아니다.

무엇보다 자유한국당이 스스로 태도를 바꿔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남북기본합의서의 합의를 이끌어 낸 노태우 정권과 김일성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조건 없이 수락한 김영삼 정부를 계승하는 정치세력이다. 지방선거의 유불리를 근거로 무작정 색깔론에 기댄 반대논리를 펴기 보다는 한반도 및 동아시아 평화와 직결되는 문제이니 만큼 전향적 태도를 보이는 게 옳다. 정 그럴 수 없다면 자기 노선을 제대로 내놓고 이에 근거한 비판을 해야 한다. “속지 말자 공산당” 수준의 논리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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