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결국 결론이 나자 시원섭섭함보다는 아쉬움이 묻어났습니다.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꿈을 이뤄낸 허정무 축구대표팀 감독이 결국 아시안컵까지 맡지 않고,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나기로 하면서 2년 6개월간 잡았던 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았습니다. 허정무 감독은 2일 오전,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싶다"면서 대표팀 연임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스스로 대표팀 감독 자리를 내놓았습니다. 이 자리에는 정해성, 김현태, 박태하 코치가 함께 했으며, 축구협회는 빠른 시간 내에 국내파 감독을 대표팀 감독에 앉히겠다는 생각으로 감독 인선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미 허정무 감독이 월드컵 전부터 "자리에 연연 않겠다", "월드컵 후에 대표팀 감독 자리를 하지 않겠다"고 해서 연임 포기 의사가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월드컵 16강을 이룬 것에 대한 기쁨을 표하기보다는 시종 담담하고 무겁게 분위기를 이끌면서 뭔가 모르게 '불명예 퇴진'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겨 안타까운 면이 많았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동안 어깨에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는다는 기분에 홀가분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 어디에도 그런 기운보다는 마치 예선 탈락하고 준엄한 심판을 받는 자리에 선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조금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이는 코칭스태프들의 표정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월드컵 원정 첫 16강이라는 숙원을 이루고도 '불명예 퇴진'한다는 기분이 들었다는 얘깁니다.

이는 허정무 감독이 기자회견중 연임 포기 이유에 대해 밝히면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잘못해서 비판을 받는 건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인신공격성(댓글)이 지나친 게 많다. 그럴 때는 힘들다.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 가족도 힘들다. 조금은 문화가 바뀌었으면 좋겠다"며 팬들의 지나친 반응이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밝혔습니다.

국내파 첫 16강을 이룬 감독이었지만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능력, 자질이 부족했다, 1승 1무 2패를 거두고도 16강에 오른 것 하나만으로 무마돼서는 안 된다, 선수빨로 16강 갔다는 등 이런저런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물론 저 개인적으로도 허정무 감독이 선보인 전술 가운데 마음에 안 들고 이해가 가지 않았던 건 많았던 게 사실이었고, 이를 블로그를 통해서도 자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블로그를 통해서도 자주 언급한 부분이지만 허정무 감독을 비판할 때는 '건전하고 건설적인 비판'이 아닌 '편견이 있고 무차별적인 비난'이 너무 강하다는 점이 늘 안타깝게만 느껴졌습니다. 허정무 감독 스타일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리는 것은 분명히 있겠지만 이를 앞서나가서 인신공격하듯이 비난하고, 없는 사실을 루머로 만들어내 퍼트리며, 가족까지 건드리면서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너무 정도가 지나쳐 보였습니다. 이런 부분 때문에 허정무 감독에 대한 시선이 불편했던 사람도 많았고, 그래서 너도 나도 허정무 감독의 자질이 의심스럽다면서 무차별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이 쏟아졌습니다.

이런 반응들에 대해 허정무 감독은 10년 전부터 보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를 접하는 가족들이 오히려 불편해 하면서 큰 짐으로 다가왔고, 결국 가족들의 만류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연임을 포기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월드컵 16강을 이루고, 세대교체 성과 등 나름대로 긍정적인 시각을 보낼 수 있는 부분이 있음에도 이렇다 할 기쁨을 대중들 앞에서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채 '불명예 퇴진'하는 듯 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만 것입니다. 조금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잠시 다른 얘기를 하자면...이는 대표 선수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 달 29일, 남아공에서 귀국한 태극전사들 가운데 이동국, 염기훈, 오범석 등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던 선수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 지금 이 쾌거를 즐기기 위해 열심히 뛰고 또 뛴 선수들이었지만 결정적인 실수가 이들을 보는 시선을 완전히 나락으로 몰고 갔습니다. 나이지리아전에서 태클을 걸어 패널티킥을 내준 김남일은 인천공항에 얼굴도 드러내지 못한 채 주장 박지성을 통해 국민대축제에서 '죄송하다'는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한 번의 실수를 전혀 감싸줄 줄 몰랐던 일부 축구팬들의 '이상한 시선' 때문에 이들은 16강에 대한 기쁨보다 깊은 상처를 얻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앞으로 있을 리그 경기에서, 소속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줄 지 걱정스럽게 보일 정도로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몇몇은 '국가대표인데 그런 아픔을 당연히 극복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지 모르겠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아마 이런 얘기 쉽게 하기 어려울 줄 압니다.

선수들도 그랬고, 허정무 감독은 분명히 최선을 다 했습니다. 전략에 대한 논란은 끊임이 없었지만 그래도 무패로 7회 연속 본선에 진출시켰고,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국내파 감독 가운데 누구도 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히 평가받을 만하고, 한국 축구 전체에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적어도 이 큼지막한 성과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보지 말자는 얘깁니다. 투톱 공격수 실험 패착, 수비조직력 실패 등 세부적인 문제, 능력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건전한 비판으로 바라보면서도 이것을 허정무 감독 자체를 놓고 비난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 말자는 겁니다. 어떤 반응을 보이든 국내파 첫 16강을 일궈낸 감독이 허정무 감독이라는 것은 절대 바뀌지 않는 역사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허정무 감독은 휴식을 취하면서 공부에도 소홀하지 않고 축구계 현장에 복귀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한국 축구 발전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그 꿈을 이뤄내면서 '불명예 퇴진'보다 '월드컵 16강 감독'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좋은 모습으로 복귀하는 허정무 감독의 미래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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