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일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은 왕이지만 그 역시도 엄연한 남자이니 사랑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 대상이 미천한 신분이지만 명민한 재능의 소유자이고 마치 동화 속 왕자님 같은 로맨틱한 국왕 폐하와의 사랑으로 빼어난 차기 군주가 태어난다면 그보다 멋진 러브스토리도 또 없겠죠. 여자에게 둘도 없는 로맨티스트 숙종과 똘똘한 슈퍼 동이와의 극적인 만남. 애초에 드라마 동이가 원했던 구도는 바로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이 임금님은 뭐 하나 딱 부러지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리저리 자신의 마음도 못 잡으며 세 여자의 사이를 갈팡질팡 오가고 있죠. 언제는 장희빈의 매력과 재기에 혹하다가도 조강지처인 인현왕후의 고고함과 순전함에 괴로워하고 그 와중에도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해버린 동이를 잊지 못해 애를 태웁니다. 그녀들을 향한 숙종의 연심은 모두가 진심이고 모든 여자들도 그를 잊지 못해 마음 아파합니다. 그러니 로맨티스트라기보다는 그 누구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희대의 바람둥이인 숙종의 애정공세는 볼수록 꼴사나워요. 결국 동이와 극적으로 재회하고 너는 내 몸과 같은 존재라며 나름의 애틋한 사랑고백을 해보지만 그 고백의 진정성은 이전 장희빈에게 첩지를 내릴 때와는 확연하게 떨어져버렸습니다. 정이 많은 것은 좋다지만 동이에서의 숙종은 너무 헤프게 애정을 남발했어요.
그것도 자기가 마치 피해자, 혹은 아무런 힘도 없는 제3자인 것처럼 말이죠. 남인이 득세한 조정에선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애초에 양 파당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며 장희빈을 내세워 그들에게 힘을 실어준 것은 국왕인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젠 남인 쪽으로 기울어져만 가는 불균형을 좌시만 하고 있던 것도 숙종이었구요. 그 와중에 장희재를 중심으로 저질러진 각종 청탁과 부패에는 어떠한 대책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무소불위라는 남인들을 함정에 빠뜨린다며 작은 기책을 내놓기는 했지만 그것이 과연 그들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 왕이 취할 일일까요?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가진 국왕인 그는 스스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꼼수만으로 일을 해결해보려는 아둔함만 보여줍니다. 이래서야 그가 왕인지 진짜 남산골의 한량인지 잘 모르겠어요.
뭐 따지고 보면 어쩔 수 없는, 처음부터 결정된 귀결입니다. 인현왕후는 어차피 죽어야만 하고, 장희빈도 결국 숙종에 의해 사사되어야 하는 운명입니다. 동이의 영조 엄마되기는 이런 숙종의 오락가락 행보의 결말일 뿐이에요. 그런 숙종을 로맨티스트로 만들어 버렸으니 결국 왕자님이 되어야할 지진희의 모습은 이 모든 피비린내 나는 전개과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그렇다고 넋 놓고 구경만 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방관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오로지 세 여자 사이에서 사랑 놀음에만 매진하는 이상한 임금님으로 변해 버렸어요. 차라리 맛있구나를 연발하던 대장금 때의 임호 임금님이 더 현실성 있어 보일 정도이죠. 동이의 지나치게 과감한 역사 재해석, 아니 겉으로만 사극인척 하기는 지진희의 숙종을 사상 최악의 한심한 임금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럴 양이면 굳이 그 앞에 역사적 인물을 빌려 온 사극이란 타이틀을 붙이지 않고 그냥 새로운 인물들을 창조하는 것이 더 나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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