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제주 4·3사건이 내일로 70주년을 맞는다. 4·3 희생자 분포지도에 따르면 북촌리는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마을이다. 북촌마을 생존자 고완순(79)씨는 이제야 속에 있는 말들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됐다며 소회를 밝혔다.

고완순 씨는 2일 CBS라디오'김현정의 뉴스쇼'와의 통화에서 제주 4·3 사건 70주년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북촌마을의 '너븐숭이 역사기념관'을 방문하고 있다는 마을분위기를 전하며 "이제는 속에 거 털어놓으니 살판 난 것 같다"고 심경을 밝혔다.

고 씨는 살아오는 동안 연좌제에 걸릴 수 있어 4·3사건에 대해 얘기하지 못해왔다고 말했다. 고 씨는 "(얘기하게 된 지)얼마 안 됐다. 노무현 대통령 때 사과하면서 이제 좀 밝혀졌다"고 말했다. 2003년 '4·3 진상보고서'가 확정되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를 방문해 유족과 도민에게 과거 정부의 잘못을 사과했다.

지난 2월 4일 제주시 조천면 북촌리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열린 '제69주년 제주 4·3 북촌리 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참석자들이 헌화·분향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북촌마을은 4·3 사건 당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마을이다. 이틀동안 3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집단학살을 당했다. 4·3 사건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경찰이 군중에게 총격을 가해 민간인 6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단이었다. 도민들은 이에 항의해 3월 10일 민관 총파업을 벌였고, 미군정은 파업 참여자 등을 가뒀다. 이 과정에서 경찰·서북청년단 등이 대거 투입되며 제주 탄압이 거세졌다.

이에 따라 1948년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응원경찰 및 서북청년단 추방' 등을 외치며 경찰서 12곳을 습격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이 때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1949년 1월 17일 군경토벌대는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전사한데 대한 보복으로 북촌마을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집단 총살했다.

고 씨는 "(당시)인구가 갑자기 6만이 늘었다. 이북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며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 군인 두 명을 죽여버렸다. 그 2명을 마을 유지들 8명이서 우마차에 싣고 부대로 가져가니까 8명 중 7명은 다 죽였다. 그러면서 '이 마을은 빨갱이 마을이다'"라고 설명했다.

고 씨는 "덜덜덜 떨면서 운동장에 끌려가 보니 운동장이 꽉 차 있었다. 총소리가 나더니 앞에 남자들이 이리저리 쓰러졌다"며 "그게 신호였었는지 그 다음에는 기관총이 사람들 위로 불을 뿜었다"고 당시 현장을 회상했다. 이어 "하루에 죽은 것이 한 380명, 며칠 사이로 죽은 사람이 600명은 될 것"이라며 "2차로 와서 종대로 않혀놓고 또 죽였다. 계엄령이 선포가 돼서 마을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고 씨는 "그런데 그 말(4·3사건에 대한)을 못 했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연좌제에 걸려 취직도 못하고, 공부해봐야 군대도 제대로 못 간다. 그러니까 우리 이런 말을 못했다"며 "영문도 모르고(죽었다). 뭐 압니까?"라고 토로했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3일 열리는 제주 4·3사건 70주년 추념사에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하는 이들이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을 것으로 알려졌다. 2일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추념사엔 '이념의 의미도 모르던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다'는 메시지가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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