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구속을 면하면서 김지은 씨의 폭로를 의심하는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 김 씨가 폭로 이후 2차 피해를 호소한 상황이지만 법원 판결 등에 따라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는 더 증폭되는 모양새다. 여성단체 관계자들은 2차 가해가 미투운동의 본질을 훼손시키고 있다며, 미투운동에 대한 사회문화적 인식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울서부지법 곽형섭 영장전담판사는 28일 "현재까지 수집된 증거 자료와 피의자가 수사에 임하는 등 제반사정에 비춰 안 전 지사가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다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했다. 법원은 "지금 단계에서 구속하는 것은 피의자의 방어권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성폭력 혐의를 받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29일 오전 영장이 기각된 직후 서울 구로구 서울남부구치소를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안희정 전 지사는 관련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안 전 지사의 불구속 소식을 전하는 기사의 댓글창에서 일부 네티즌들은 '치정도 구속 사유인가?', '당연한 결정', '성폭력 피해자와 꽃뱀은 엄격하게 구분돼야 한다', '뉴스룸 인터뷰부터 이상했다' 등의 의견을 내고 있다. 법원의 판단이 2차 가해의 빌미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김지은 씨는 지난 5일 안 전 지사의 성폭행을 폭로했던 JTBC 뉴스룸과의 인터뷰에서 "인터뷰 이후 제게 닥쳐올 수많은 변화들이 충분히 두렵다. 하지만 저한테 제일 두려운 것은 안희정 지사"라며 "그래서 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게 방송이라고 생각했고, 이 방송을 통해 국민들이 저를 조금이라도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씨의 폭로는 많은 지지를 불러오기도 했으나 인터뷰 직후 김 씨를 둘러싼 각종 루머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김 씨는 인터뷰 일주일 만인 지난 11일 자필편지를 통해 2차 피해를 호소했다. 김 씨는 자필편지에서 "다시 한 번 용기 내 편지를 올린다. 더 이상 악의적인 거짓 이야기가 유포되지 않게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루머는 지속됐고, 안 전 지사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김 씨의 폭로를 의심하는 반응들이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이와 같은 '2차 가해'에 대해 여성단체 관계자들은 미투운동이 벌어지게 된 계기와 본질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남정숙 전국미투생존자연대 대표(성균관대 교수)는 29일 미디어스와의 통화에서 "법과 제도, 사회 시스템이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었다면 절대로 지금과 같은 미투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며 "안 전 지사의 경우 권력형 성폭력이다. 재판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그 전에는 철저하게 피해자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 대표는 "재판을 하려면 2~3년은 걸린다. 그동안 조직 내 피해자는 조직에서 퇴출된다"며 "그럼에도 살기 위해 폭로를 하고 재판에 나섰다. 피해자를 비난하기보다는 피해자를 보호할 시스템과 법적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게 더 올바른 시민의식"이라고 지적했다.

김영순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역시 "어쨌든 법적으로 다툼이 있겠지만 수행비서와 지사와의 관계다. 명백하게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라며 "위계에 의한 성폭력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김 대표는 "(피해자는)원래 의심받았었고, 그래서 그동안 폭로를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안 되겠어서 폭로가 시작된 것"이라며 "법과 제도는 처음부터 피해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였다.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여성들이 뭉쳐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되는데 투쟁을 하겠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미투운동은 법과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에서 여성이 말할 수 있게 하는 문화"라며 "상징적으로 안 전 지사에 대해 방조하고 침묵하는 문화 때문에 그동안 여성들이 말을 못한 것이다. 미투운동에 대한 사회문화적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장미혜 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2차 가해로 인해 미투운동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장 연구원은 "미투운동에 대한 피로감, 반대기제가 다 섞여 나타나는 시점인 것 같다"며 "피해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운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이뤄지는 미투운동에 대해, '증명되지 않은' 사람들이 나도 당했다고 추가 증언을 하는 데 대한 일종의 '브레이크'"라고 분석했다.

장 연구원은 "피해자는 한 번 얘기를 꺼내는 것도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거기에 피해자는 재판을 반복하고, 피해사실을 입증하고, 반대 댓글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이라며 "'폭로를 하고 나면 저렇게 되는구나'라는 인식이 생길 것이다. '와르르 폭로가 이어지더니 다음은 달라지지 않더라'라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 이후 피해자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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