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인적 네트워크다. 전문 성우는 안정성이 없어 지역에서 활동하기가 어렵고, 중앙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는 제작비나 여건상 지역으로 초청하기가 쉽지 않다. 괜찮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지역의 주요 방송사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목소리의 변별력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모 방송사처럼 지역에서 취재 소스만 다 준비해서 서울에서 세련된 성우 목소리를 담아 완제품을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한편으론 취재만 지역에서 하고 서울에서 다 만들어오면 그게 무슨 지역방송으로 의미가 있나 판단이 서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서 고집스레 실행하고 있는 작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역 주민과 방송하는 것이다.

2005년 전주 한지(韓紙)를 소재로 한 방송을 만들었을 때는 유치원에 다니는 7살 이예인 어린이에게 나레이션을 맡겼다. 평범한 한지 한 장이 빚어내는 무한한 가능성을 표출하는 과정으로 처음부터 어린이를 염두에 둔 기획이었다.

하지만 연기 수업한번 받지 않은 유치원생에게 무슨 기대를 할 수 있겠는가? 글자나 제대로 읽을까? 여러 가지 부담과 우려가 많았지만 최종적으로 ‘그래, 어린이가 못 하는 게 당연하지. 잘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으로 도전했다. 예인이는 기대 이상으로 선전해서 오히려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러 번 녹음하는 기염을 토했다. 예인이와 방송을 한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지난 해에는 고령화 문제에 관심을 돌렸었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치달으면서 야기되는 여러 가지 사회적 현상을 보면서 "늙는 것이 꼭 부끄러운 것인가? 노인 이야기를 좀 더 유쾌하게 접근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멋지게 늙는 법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멋지게 사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담기로 했다.

말하자면 노인 문제의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것이다. 이렇게 기획된 <신 노인백서>는 전주에서 노인들로 구성된 인형극단 <실버서포터즈>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 분들은 소비자정보센터에 소속된 자원봉사 할아버지 할머니들로 인형극을 통해 소비자 문제를 짚어주고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상대로 약이나 전기제품 판매와 같은 불법판매가 판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 분들에게 소비자 교육이 왜 필요한지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들을 방송국으로 초대하여 멋진 인형극을 만들면 어떨까? 이 대본을 토대로 새로운 인형극을 창출한다면 또 다른 노인 교육을 실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마지막 3부는 인형극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는데 1, 2부에서 나레이터를 누구로 내세울까 고민이 되었다.

사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방송을 제작한다는 것도 좀체 인내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작업이다. 이참에 돈좀 더 들이고 세련된 성우로 나레이션을 확 바꿔버릴까나, 나레이션만 잘 해도 반절은 먹고 들어가는데……. 온갖 상념이 머리를 스치다 결국 방송 경험이 전혀 없는 67세 윤정임 할머니에게 나레이션을 맡겼다.

역시 잘 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은 채 다만 노인 이야기 역시 노인이 풀어내야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점과 나의 방송관 가운데 초심으로 돌아와 ‘지역 주민과 함께 하는 방송’으로 회귀하기에 이르렀다. NG에 NG를 거듭한 결과 그럭저럭 방송 한편이 만들어지고, 인형극에 참여한 할머니들은 "아이구 형님, 우리가 평생 살면서 언제 이렇게 방송국에서 방송해보겠어유~"하면서 즐거워들 하셨다. 하기야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방송국에 다녀가셨을까.

이렇게 고심해서 만든 작품이 작년 11월30일 딱 한시간30분 전파를 타고 나간 후 "노인 얘기가 즐거울 수도 있구나", "나도 잘 늙어야 겠다" 등등 청취자들로부터 기획한 대로 피드백을 와서 고무되기도 했다.

할머니들과 함께 만든 이 작품이 최근 인구보건복지협회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선정한 제1회 '저출산ㆍ고령사회 대응 우수 방송프로그램(새로마지 방송상)' 수상작에 선정됐다. EBS 특별기획 '가족실험 프로젝트', KBS 1TV '생로병사의 비밀'의 '51g속의 기적-탄생을 돕는 첨단불임치료'편, KBS 1TV '언제나 청춘' 프로그램과 더불어 누린 영광이다. 저출산ㆍ고령사회 대응을 위한 방송의 역할을 강화하고 제작진을 격려하고자 마련됐다는 취지에서 제작자 입장에서 큰 용기가 나고 무엇보다 훈련되지 않은 투박한 할머니들의 진솔함이 전달된 것 같아 기쁘다.

지역에서 촌티 팍팍 내가며 할머니들과 만든 질그릇 같은 방송이기에 자긍심이 새롭다. 난생 처음 방송국에 와서 마이크 구경하고 그 자리에서 ‘뚝딱’ 방송 해치운(?) 우리 할머니들이 자랑스럽다. 할머니들과 방송한 것, 참 잘한 일이다.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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