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인 스트라이커 황선홍이 월드컵 기간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이회택과 차범근, 변병주와 최순호를 이은 최고의 스트라이커 계보는 바로 황선홍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최고의 스타인 최순호를 제치고 대표가 된 그의 14년 동안의 국가 대표 시절은 롤러코스터였습니다.

황선홍을 통해 대한민국 축구 현대사를 이야기 하다

1.

2010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보이는 황선홍은, 자신의 축구 인생을 통해 한국 축구의 현대사를 이야기해주었습니다.

94 미국 월드컵을 통해 최악의 스트라이커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야만 했던 그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화려하게 부활하며 롤러코스터 인생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가장 화려하게 시작해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힘겨움을 경험해야만 했던 그를 통해 대한민국의 축구와 축구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조금이나 알 수 있었던 <무릎팍 도사>는 한 인물을 통해 전체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밀도는 떨어지지만 폭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최고의 공격수였던 이회택에 의해 파격적으로 발탁되었던 황선홍은 너무 어린 나이(21 살)에 최고의 공격수였던 최순호를 대신해 국가대표가 되어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하늘같은 선배들과 함께 하며 기를 펼 수조차 없었던 그가 화려하게 세상에서 자신을 알린 것은 바로 일본전이었습니다.

자신이 국가대표가 되어 치른 첫 경기였던 아시안컵 일본전에서 그는 1골 1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이 거둔 두 골에 모두 개입하며 영웅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어린 나이에 무서울 것이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축구팬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 그의 월드컵 참가는 대한민국 현대 축구사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예선전 6경기에서 7 골을 넣는 기록으로 많은 기대를 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세계 축구와의 엄청난 차이는 우리에게는 참가하는 것만으로 영광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벨기에(0-2), 스페인(1-3), 우루과이(0-1)로 3전 전패를 기록했습니다.

2.

황선홍으로서는 두고두고 한스러운 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첫 승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우승 후보였던 스페인에 맞서 0-2로 끌려가던 경기를 홍명보의 추가골과 서정원의 극적인 동점골은 16강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한껏 올려놓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약체였던 볼리비아와의 경기에서 이긴다면 독일과 스페인과 한 조가 된 대한민국도 16강을 넘볼 수 있게 되니 말이지요. 하지만 전 국민의 기대와 염원이 가장 강렬했던 이 경기에서 스트라이커 황선홍은 최악의 플레이를 하며 홈런 볼만 양산하며 무승부의 모든 멍에를 짊어져야만 했습니다.

비록 독일 전에서 골을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볼리비아 전에서의 그의 모습은 이후 황선홍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경기에서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보여줘도 많은 이들은 그에게 차갑기만 했습니다. 월드컵이라는 최고의 대회에서의 모습은 여타 대회에서 아무리 월등한 능력을 선보여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로 다가오기만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 월드컵은 희망으로 찾아왔지만, 98년 프랑스 월드컵은 그의 인생에 전환점으로 다가왔습니다. 최고의 모습으로 대표에 선발된 그는 프랑스로 향하기 전 날 벌어진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을 당하고 이로 인해 본선에 한 게임도 뛰지 못한 채 최악의 경기들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멕시코(1-3), 네덜란드(0-5)에 이은 벨기에(1-1)은 참혹할 정도였지요. 하석주 선수의 첫 골과 퇴장은 최악이 시나리오의 시작이었고 당시 상대팀 감독이었던 히딩크의 네덜란드에 참혹한 5-0 완패는 차범근 감독을 중도에 하차시키는 황당함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차범근 감독과 한국축구협회의 악연은 시작되었고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는 상황이니 98년 월드컵은 많은 이들에게 고통스러운 경기였던 듯합니다. 부상으로 경기를 할 수 없었던 황선홍에게는 두려워 뛰지 못하느냐는 비아냥이 이어졌고 이런 분위기에서 국내에서는 축구를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일본으로 향합니다.

무릎팍 도사에서 처음 밝혔다고 하듯 그는 일본 프로축구팀의 러브콜을 받고 간 것이 아닌 자신이 직접 찾아가 연습생처럼 시작을 했다 하지요. 대한민국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굴욕적인 상황에서 일본에서 축구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축구는 버릴 수 없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날선 시선들은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최악의 상황에서 다시 시작한 그는 연습생이라는 치욕을 자신의 실력으로 만회하며 다음 해 J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그의 인생 가장 화려한 순간을 맞이합니다. 마지막일 수밖에 없는 2002 월드컵에 어렵게 승선한 황선홍은 은퇴 선언을 하는 배수진을 치며 경기에 임했습니다.

그런 그의 노력은 2002 한일 월드컵 첫 경기인 폴란드전에서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자신의 오명을 모두 날려버릴 수 있었던 멋진 첫 골을 집어넣고 대한민국의 첫 16강에 큰 족적을 남긴 그는 대한민국 축구 대표 팀을 상징하는 스트라이커로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마지막 선전으로 그의 축구 인생을 화려하게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전에서 눈 위가 찢어지며 쏟아지는 피를 응급처치를 하고 붕대투혼을 발휘해 지고 있던 경기를 무승부로 만들었던 경기는 대한민국의 투혼을 엿볼 수 있는 명장면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14년간의 굴곡 많았던 대표 생활을 가장 화려하게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3.

그에게 축구는 행복이었습니다. 주목과 비난을 동시에 받아야만 했던 스트라이커로서 살아왔던 그에게 축구는 힘들어서 숨고 심을 정도로 암울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이를 모두 이겨내고 최선을 다했던 만큼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주목과 비난을 숙명으로 생각하고 의연함으로 대처해나가기를 바라는 황선홍에게 이제는 편안함이 엿보입니다.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쉽지 않은 감독 생활을 하고 있지만 자신을 응원해주는 팬들과 선수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의 다짐이 좋은 성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월드컵에 나선 후배들에게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았던 상황을 지속적으로 돌아보라 합니다. 자주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몸이 따라한다는 그의 말은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멘탈 스포츠인 축구 경기에서 정신을 지배하지 못해 힘겨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였기에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당부일 수도 있을 겁니다.

경험을 통해 얻어낸 지혜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대한민국 축구의 깊이가 깊어가는 과정일 테니 말입니다. 16강에 올라선 상황에서 시의 적절하게 편성된 <무릎팍 도사 황선홍>편은 황선홍이라는 인물의 축구인생을 통해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담고 있었습니다.

어렵고 힘들게 16강에 올라간 대한민국 대표 팀이 결코 만만하지 않은 우루과이를 맞이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 한다면 의외의 성과들은 나올 수 있을 겁니다. 그가 후배들에게 당부하듯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에 임한다면 어게인 2002가 꿈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