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서 2018년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최근의 일련의 흐름을 ‘2016년 촛불혁명’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인지 모른다.

말을 보태기가 매우 조심스러운 문제이지만, 그래서 흔히 언급되지는 않는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민주주의’를 유난히 강조하던 한 정치인의 전락이 던지는 질문은 이외에도 많을 것이지만, 이 질문 역시 던져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괜찮은 조직, 나쁘지 않은 일터에 대한 상이 전무한 것이 아닐까?’

2016년에 발생해서 결국엔 현직 대통령을 끌어내린 게이트는 보수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최나 박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는 놀랍지 않다. 어느 나라에나 사이비교주나 그에 속으면서 권력을 나누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들이 그 위치까지 올라갔다는 것이다. 무언가 정상적이지 않은 일처리 방식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양대정당 중 한 정당의 대표로 활동하고 급기야 대통령이 될 때까지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우리의 조직문화, 일문화가 어땠기에 이것을 잡아낼 수 없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다들 몇몇 개인들이 특이한 이라고 비난하는 것 정도로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민주당 정부가 부르짖는 적폐청산에서도 그 개인들의 범위를 넓힐 뿐 이 부분에 대한 고려는 별로 없어 보인다.

새누리당 출신 정치인들은 누구보다도 더 그 지점을 반성해야 할 처지에 있지만 질문이 던져지지 않으니 이 지점에선 초보적 수준의 반성문조차 나오지 않는다. 국민적 사랑을 받을 사연이 있는 정치인을 사이비종교 성향의 일당이 확보하고 있는 지극히 예외적 상황이 또 닥치기는 어렵겠지만, 이러면 게이트가 파헤친 문제를 대면하지 않고 서둘러 삽질로 흔적을 지우는 격이다. 그만한 부조리는 아니더라도 다른 종류의 부조리는 끊임없이 생길 수 있는 환경을 방치한 셈이다.

또 다른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에서 드러나는 사실들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대표작인 ‘일잘’(‘일을 잘하는 이’란 의미의 인터넷 용어)로 꼽혔다. 정치적 반대파들은 그가 비리를 저질렀다는 사실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가 솜씨 좋게 처리했을 것도 분명하다고 봤다. 그래서 그의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팟캐스트 시리즈를 수십 시간 청취하는 수준의 공부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런 팟캐스트 방송이 공전의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웬걸 이게 뭔가. 사이비종교인 일당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명성에 비해 너무 소박하고 치졸하다. ‘높은 곳 공기’를 흡입하는 분들은 중소기업 사장님들이 모르는 무슨 비법이 있을 거라는 우리의 기대를 확연하게 저버리고 있다. 그가 영세자영업자나 중소기업 사장님들과 달랐던 것은 권력기관을 섭외하는 능력의 차이 밖에 없었다. 이제 '유능한 악당'으로 믿을 수 있는 집단은 삼성전자 법무팀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허탈하지 않은가.

두 전직 대통령의 행동 패턴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이쪽은 이권집단이었다. 분배와 정산을 잘했다고 여겼다. 그런데도 민낯을 까보니 대충 대충 처리하고 대충 대충 덮은 일이었다. 가치추구나 이윤추구가 목적이 되고 그 목적을 위해 기능적으로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조직 따위 없었다. 그 안에는 권력을 둘러싼 동심원만이 존재했다. 그런 조직, 그런 일터에서 성추문이나 직장 내 폭력은 상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다만 밖으로 흘러나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다시 요즘의 사례로 돌아오자. 민주주의를 유난히 강조하던 그 정치인의 가장 가까운 동심원에 소속된 언어들은, 80년대 학생회장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그는 한때 그 시절로부터 많이 벗어나고 발전해온 정치인으로 자신을 치장했고, 여론도 그리 평가했다. 그러나 공무원과 소통을 할 때 추구됐다던 그 민주주의는, 가장 가까운 동심원 내부에는 없었다. 그리고 권력과 폭력이 있었다. 캠프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훨씬 협소한 영역의 사례이지만, 유난히 트위터에 친화적인 구성원을 보유하고 있었던 한 작은 운동권 정파가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언더’ 조직을 통해 유지되었다는 논란도 이와 포개서 생각해 볼만할 것이다.

이 쓰나미 내지는 토네이도 같은 조류는 분명히 여러 개인들을 조심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 조심성의 방향이 자아성찰인지 ‘펜스룰’(미국 부통령 펜스의 이름을 딴 룰. 와이프 이외의 여성과 식사하지 않는 등 여성들을 피하는 식으로 성추문 문제를 벗어나려는 행동패턴에 대한 호칭이 됨)인지는 여전히 개인들의 선택에 맡겨져 있다.

이것은 그 개인들의 반페미니즘 성향을 비웃고 끝낼 문제는 아니다. 자연재해가 닥쳐오면 사람들은 당연히 피한다. 동굴이 있다면 동굴로 갈 것이고, 집이 있다면 집문을 걸어 잠글 것이다. 동굴로 도망치는 대신 집을 만들자고, 집이 있다면(아무리 그래도 한국 사회가 집은 있는 수준일 것 같다) 그 이상의 예방수단을 함께 만들자고 말해야 할 책임이 담론가들에게 있다.

이 재해의 책임이 누구누구에게 있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대신에 말이다. 물론 그 말은 원론적으로 사실이지만 인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재해가 신의 징벌이라는 식의 개신교 목사님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수준 이상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펜스룰’의 문제는 여성 배제나 차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일터에서 능력에 비해 남성을 선호하는 현상은 그들이 남성을 예뻐하기 때문이 아니다. 좀 더 마음편히 갈굴 수 있는 이, 한마디로 말해 좀 더 막굴릴 수 있는 이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 조직문화는 여성의 사회진출 이후 상당 부분 완화된 부분이 있고, 거기에선 남성들도 수혜를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니 완화된 압력이 성별에 의해 불균등하게 부과된다. 남성이 여성의 사회진출에 의해 수혜를 입었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는 본인이 더 차별받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건 그들이 페미니즘 도서를 더 열심히 읽고 교양학습을 당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터져 나온 사건들을 살펴도 여성들이 당할 때 남성들도 다른 방식으로, 주로 폭행 등의 방식으로 당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보였다.

우리에겐 다른 길의 경험이 필요하다. 책으로 보고 외국 드라마에서 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어설프게 재현하고 시행착오해서라도 우리의 뇌와 몸에 각인시켜야 하는 다른 길의 경험 말이다.

이 사태에서 본 긍정적인 부분은 민주당의 대처속도가 대선이 끝난 지금도 여전히 빠르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닥쳐온 위기에 대한 관리능력이지 위기의 생성원인을 없애는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폐허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거기에 새로운 무엇을 세울 수 있을까를 질문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재해가 피로감으로 인해 소진되고, 문제는 반복되고, 이후 다른 시기에 다시 재해처럼 바람이 닥쳐오는 풍경을 또 봐야만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