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마이뉴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년 전, 어느 한국인이 이라크에서 무장단체에 피랍됐다는 소식이 전 세계 언론에 긴급 타전됐다. 무장단체가 만들어 뿌린 동영상의 주인공은 창백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그리고 불과 사흘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다.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무장단체가 요구한 한국군 철수는 그가 나고 자란 조국에 의해 즉각적으로 거절됐다. 서울 주재 외신기자들조차 한국 정부의 강경 입장을 보도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상황에서, 살해된 이의 조국은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추가 파병 방침을 단호하게 천명했다. 주어진 시한은 24시간. 포로 석방을 위해 외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는 명백한 ‘정치적 수사’가 신문과 방송을 지배했다. 어쩌면 무장단체에 붙잡히는 순간에 이미 그의 운명은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은 적잖은 충격을 몰고 왔다. 한 핏줄을 가진 동포의 죽음은 이라크를 비로소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게 해주었다. 파병의 정당성에 대한 비생산적인 논쟁의 장(場) 위에서 테러리즘과 보복, 국가와 국민의 관계, 책임론 시비가 난마처럼 뒤엉켰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던진 근본적인 의문이 된 한국군 이라크 파병의 정당성 문제는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한 채 유야무야 묻히고 말았다.

김선일. 저 깊은 망각 속에 묻혀 있던,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의 죽음은 6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논의의 출발점은 당연히 “근본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가 될 것이다. 도정일이 적확하게 지적한 대로, 이라크 침공의 부당성을 뒤늦게 후회하고 반성한 미국의 유력일간지 <뉴욕타임스>가 정작 그 누구에게도 잘못된 결정의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국가와 국민을 일체화하는 ‘집단사고’(groupthink)의 결과로 나타난 정책적 오판(誤判)이 비단 파병안에 서명한 대통령 한 사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미국 의회가 승인하고 다수 국민과 언론이 지지한 침공이며, 따라서 전쟁의 책임은 정부, 의회, 국민, 언론의 층위로 분산돼 있다.”(도정일) 국가 전체가 공범이 되는 난처한 딜레마에 빠졌음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그 책임을 물을 수조차 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한국의 집단사고는 어떤가. 이라크 파병 동의안은 의회의 예산권과 삼권분립의 원칙을 침해하고, 국제법상 전쟁행위를 용인함으로써 대한민국 헌법을 명백하게 위반한 일이었다. 분명 국제법과 헌법에 어긋나는 파병의 불가피성을 설파하기 위해 동원된 실리론과 국익론, 동맹론 따위의 명분에 힘을 실어준 건 바로 국민 자신이었다.

그 거창한 국익(國益)의 대가는 한 사람의 죽음과 교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명분을 앞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맥락에서 집단사고가 쉽사리 망각으로 이어지는 이치도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누군가가 혜택을 누리는 현실과, 그로 인해 누군가가 다치는 현실을 고통 없이 이야기하는 이 미끈한 현실적 국익론이 늘 승산이 있다고 믿는 것은 우리가 쉽사리 국익과 연루된 우리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려달라는 한 젊은 노동자의 절규가 우리 속에서 빠른 속도로 잊혀져가는 것도, 우리와 닮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이라크인들의 고통과 죽음이 여전히 우리와 시야 밖에 버려져 있는 것도 그 계산의 효능을 입증해주는 증거이다.”(황용연) 김선일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전쟁 또는 테러로 표현되는 이라크 문제를 표면적으로나마 ‘구경거리’가 아닌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런 일시적인 감정이입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무장단체에 참살된 다른 미국인, 유럽인이 아닌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손쉬운 망각의 또 다른 이유를 깨닫게 된다. “보편윤리 아닌 상황윤리, 인류에 아닌 동포애가 우리가 경험한 ‘각별한’ 충격의 배후에 있었다. 우리의 빈약한 도덕적 감수성은 죽음조차 국적에 따라 분류하며, 충격마저 국적에 따라 조정한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이상길)

▲ '아부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 책표지
김선일은 납치되기 직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약자에 대한 마음도 어느 정도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소름끼치는 미군의 만행을 담은 사진도 가지고 갈 거다. 결코 나는 미국인 특히 부시와 럼스펠드, 미군의 만행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알 권리’를 내세운 한국 언론의 보도는 김선일의 일거수일투족을 파헤치고 가족들의 반응을 상세하게 담아냄으로써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흘렀다는 비난을 샀지만, 그의 죽음이 ‘파병 반대’와 연결되는 것은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오로지 안타까움만 반복해서 과장되게 부각됐을 뿐이다. 김선일의 ‘살 권리’는 진지하게 배려되지 않았다. 정부가 선전하고 언론이 퍼 나르는 집단사고에 무비판적으로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김선일의 죽음은 하나의 구경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바, 수전 손택의 말을 인용한 다음의 구절은 죽음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을 매우 적절하게 설명해준다. “실제의 공포를 근접 촬영한 이미지를 쳐다볼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사람은 그런 고통을 격감시키려 뭔가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이거나 그런 고통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의도했든 안 했든, 나머지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이승원)

이 책은 이라크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아부 그라이브’를 전면에 내세운다. 아부 그라이브에서 자행된 미군의 무자비한 이라크 포로 학대의 뿌리를 미국의 하위문화에서 찾는 한 필자의 통찰은 주목에 값한다. “이라크 포로들은 모욕적인 고문을 당하면서 사실상 미국 문화 속에 편입됐던 것이다. 포로들은 개인적 존엄, 민주주의, 자유라는 공개적 가치들에 필수 부가물을 이루는 미국 문화의 역겨운 이면을 맛보았다. (…) 스크린과 신문의 1면에 실린 이라크 포로들을 모욕하는 사진들을 볼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미국의 가치들’에 대한, 미국적 생활양식을 떠받치고 있는 혐오스러운 쾌락, 바로 그 핵심에 대한 하나의 통찰이다.”(슬라보예 지젝) 멜 깁슨이 연출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대한 미국 관객의 열광에서 아부 그라이브의 단초를 찾아낸 다른 필자의 주장도 핵심을 찌른다. “이 두 가지 행위는 사도-마조히즘적 활동이라는 동일한 심리 동학에서 유래한다. 대규모 관객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격정을 창조하기 위해 극대화된, 반복되는 고통과 극단적 야만의 이미지들, 잔혹한 스펙터클로부터 과도한 환희가 나온다.”(월터 데이비스)

6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에서 이 책이 다시 읽혀야 할 마땅한 계기성을 찾을 길은 없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과 그 죽음이 본질적으로 성찰되어야 할 절실한 필요가 너무나도 무력하게 무시되고 망각되는 비극을 최근 우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김선일의 죽음에도 이라크는 그저 타자일 뿐이었는데, 우리의 빈약한 현실 인식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 용산참사라는 상징적인 사건에도 어김없이 투영되어 예의 무관심과 망각은 놀랍게도 똑같이 변주됐다. 용산은 그 숱한 죽음에도 문제의 본질을 성찰하는 한 차원 높은 논의를 생산해내지 못했고, 그럼으로써 죽음은 그들만의 비극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후세인의 30년 독재가 미군에 의해 마침내 무너져 내렸을 때, 이라크인들은 잠시 기뻐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독재자의 빈자리는 또 다른 제국주의 권력으로 대체됐고, 미군에 의해 저질러지는 온갖 만행에서 이라크인들은 후세인의 공포정치를 떠올렸다. 자유와 평화의 약속은 온데간데없이 하루가 멀다 하고 테러가 끊이지 않는 이라크의 현실은 오바마 집권 이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우리가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 남의 일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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