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해외에서 맺어진 삼성과 막강 로비기업 사이의 협력관계가 국내로 역류해 MB 전 정권의 아킬레스건인 다스 문제와 엮이는 이상한 가역작용을 따라잡고 있다. 이재용-최순실-박근혜 게이트 때와 비슷하게, 삼성-해외로펌-정권이 하나의 커넥션으로 이어진 흥미로운 양상을 살펴보는 중이다. 다스 사건 배후에 자리한 자본-초국적 비선-국가의 수상쩍은 진상을 그려보는 포스트저널리즘의 연속이다.

그러기 위해 에이킨 검프라는 고리에 계속 집중할 것인데, 이 초국적 로비회사는 2000년 4월 눈에 띄는 행보를 택한다. 뉴욕의 라이벌 회사로부터 두 명의 최고급 변호사를 파트너로 영입한다. 이들은 한국 관련 법률업무만 전담하는 변호사 그룹에 합류할 텐데, 이를 보도한 미국의 업계 전문지 <더 로이어 The Lawer>에 따르면, 이 집단은 그때 이미 삼성전자와 현대, 포항제철을 비롯한 다수의 국내 대기업들을 변호하고 있었다.

영입된 두 명 중 하나인 한국계 변호사는 “에이킨 검프가 지닌 정부 기관들과의 강력한 관계가 고객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될 거”라 여겨 이직을 결심했다고 밝힌다. 이에 대해, 에이컨 검프 회장은 두 사람의 합류가 회사의 한국관계 사업역량을 더욱 증대시킬 거라며 환영한다. 이들은 한국 투자 외국회사와 벤처펀드, 부동산개발업자를 상대하는 한편, 한국 정부와 한국 금융회사, 자산관리공사, 일반기업 고객들의 미국 내 업무도 대리할 것이다.

[단독] 진실공방 키맨 김석한 검찰 소환조사 난망 (연합뉴스TV 보도화면 갈무리)

에이컨 검프는 이렇듯 한국관련 사업에 진작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계속해서 키워갔다. 그 특별한 업무를 오랫동안 책임져온 변호사, 파트너가 바로 김석한 씨다. 1998년 아시아계 최초로 최고 경영자 자리에 올랐다는 인물이다. 이 재미 변호사는 애당초 ‘사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앞선 <더 로이어>에 따르면, 2000년 이미 한·미 통상문제 최고의 권위자 중 하나로 꼽히고 있었다.

“한국과 미국 간 경제 및 무역 관계에 영향을 끼칠 국제적 경제정책 이슈들에 관해 한국 정부에 의견을 주는” 위치의 인물로 평가 받았다. 한국에서도 그는 비교적 잘 알려진 편이다. 2004년 ‘에이킨 검프 법률회사 매니징 파트너’의 자격으로, <조선일보>에 시론을 쓸 정도다. 3월 12일 자 “FTA, 더 많이 맺어야”라는 제목의 글에서, 구체적으로, 그는 한국과 칠레의 자유무역협정이 “한국 경제사에 대단히 중요한 이정표를 찍었다”고 평가한다.

한·칠레 FTA는 한국의 국제 사회 지위를 향상시키고, 추가적인 FTA 체결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이번 협정은 한국이 추구하는 FTA의 표준 모델이 될 수 있으며, 한국은 적극적으로 FTA를 체결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세계에 전달할 수 있다. 앞으로도 FTA는 지속적으로 확산돼야 하며, 주요 통상 국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 FTA는 단순한 무역 증대뿐 아니라 투자와 경제 교류 협력을 동시에 강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김석한은 자유무역협정의 열렬한 전도사로서 한국에 이미 출연했다. 에이킨 검프라는 이름과 함께, 우리에게 일찌감치 다가와 있었다. 기실, 조지타운대학 로스쿨을 졸업한 김석한이 한국에 얼굴을 알린 건 이보다 훨씬 이전이다. 1982년 전두환 시기, <매일경제>가 후원하고 무역협회와 한미경제협의회가 공동주관해 윌리엄 로저스 국무성 차관 등 전문가 초청 ‘미경제 관계 법령 세미나’를 할 때부터다. 35년 전이다.

1983년 미 제너럴 일렉트릭(GE)과 노조 등이 삼성, 금성, 대우 등 국내 3개 가전회사를 제소하며 그는 더욱 두각을 나타낸다. 한국기업들이 미국시장에서 칼라TV를 국내가격보다 15-45% 싼값으로 덤핑 판매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미 상무부가 덤핑혐의를 인정하고 나선다. 이때 덤핑관세부가 최종결정을 막기 위해 고용한 변호사가 다름 아닌 김석한이다. 당시, 그는 아널드 앤드 포터(Arnold & Porter)라는 로펌 소속이었다.

<경향> 등 유력 매체는 물론이고, 전경련 등이 나서 매년 그를 모셔온다. 80년대 줄곧 그는 양국을 오가며 한국의 경제, 미국의 무역·관세 문제에 관해 자문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보수지에 기고도 자주 한다. 그가 속한 로펌은 무역협회와 84년 법률자문계약을 맺을 것이며, 자신은 협회 고문변호사가 된다. 그 와중에 그는 국내 타이어업계를 대신해 한국산 래디얼 타이어가 미 시장을 교련하지 않았다는 덤핑무혐의 판정을 받아내는 기염도 토한다.

한국기업을 상대로 대미로비 방법론을 교수하는 그다. “정책결정을 내린 인물과 심지어는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까지 찾아내고 반대세력은 누구이며 왜 반대하는가 등을 모두 파악한 후 로비를 맡길 책임자를 골라야 한다.” 85년 10월 28일자 <경향>의 기사내용이다. 에이킨 검프 선임변호사로 그 사이 자리를 옮긴 그는, 90년대 강화될 미 통상압력에 맞서기 위해 “적인지 동지인지 구별할 수 있”는 “보다 현명한 대미 대응방식”을 주문한다.

1992년 1월 7일자 <동아일보> 기고를 통해서다. 그는 주미 한국대사관 ‘통상 및 경제담당 고문변호사’로도 위촉되어, 대미홍보공세의 강화 필요성을 계속해 역설한다. 그리고 1993년 11월 1일, 그는 10년이나 이어진 한국산 칼라TV 덤핑 마진 소송이 마침내 한국 측 승소로 끝났음을 자랑스럽게 발표할 것이다. 삼성전자 등 한국 가전회사들로 하여금 미국에 예치했던 덤핑관세 차액 1억 달러 가량도 돌려받게 해준다. 그런 능력자 김석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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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대단한 변호사다. 그런 실력을 배경으로, 김석한은 97년 클린턴 방북 특사에 포함된다. 통상문제에 전향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한국정부가 서둘러 ‘무역대표부’를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도 내놓을 것이다. 이런 충고를 삼성 등 한국의 재벌은 물론이고,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경련과 무역협회, 정부가 당연히 귀담아듣는다. 조중동 등 보수매체도 신뢰하고 주의를 기울인다. 그의 기고, 그와의 인터뷰가 계속되는 까닭이다.

김석한은 그런 한국 정재계의 유력한 고문, 외부 조력자였다. ‘듣보잡’이 아니며, 2000년대 들어서도 이 한국계 미국 통상·로비 전문가의 활약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2005년 5월, 그는 에이킨 검프 수석변호사 자격으로 <동아일보>에 기고문을 싣는다. “철강-자동차 대미수출 조절”을 구체적으로 조언한다. 그 후 로펌 파트너가 된 그가 보기에는, 로비강화가 문제해결의 정답이다. 그런 그가 재차 주목을 끈다. 한국사회가 한미FTA 협상개시로 들끓을 때다.

김 변호사가 원했던 추가적 FTA 체결이 가속화되면서다. <동아>는 “미국의 법이 글로벌스탠더드가 되고 미국 법원이 국제 법률전쟁의 전장이 되”는 현실이라며, 당시 56세인 김석한을 미국의 가장 유명한 한국계 변호사로 소개한다. ‘통상문제전문가’로 부각시킨다. 그 사이 한국에는 역사의 심판대에 다시 오른 뉴라이트 MB정권이 출범하여, 한미FTA의 양국 국회비준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었다. 조중동이 뜨겁게 가세한 상태였다.

<동아>가 김 변호사를 전 미무역대표부 부대표인 GE 부사장, 전 주한 미 대사와의 특별좌담에 앉힌다. “선거철 미 의회 움직이려면 쇠고기 문제부터 해결을”이 토론 제목이자 결론이다. 결국 MB정부가 미국과의 쇠고기문제 추가협의에 나선다. 협상이 신속히 타결되며, 반대 시민들은 거대한 촛불을 밝힌다. 김 변호사가 다급히 <중앙>에 “쇠고기 협정 오해해선 안 된다”는 시론을 쓰는 까닭이다. 격렬한 시위가 한미FTA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한다.

“과학적 근거를 넘어선 과도한 광우병 우려로 한미자유무역협정은 물론 한미관계에 큰 상처를 남길 것”이라며, <문화일보>도 그의 견해를 빌린다. “광우병 발병확률만 하더라도 한 사람이 벼락 맞으면서 지진과 총까지 동시에 맞을 만큼 낮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재협상에 응했지만 한국 측 주장의 논리적 근거 때문이 아니었다.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는 법위에 ‘국민정서법’이 있다는 것도 한국 내 여론의 감성적, 비합리적 요소 때문”이라는 또 다른 좌담에서의 그의 발언을 전한다. 논란은 ‘광우병 괴담’으로 뒤틀리고, 촛불은 빠르게 진압되어간다.

[단독] 진실공방 키맨 김석한 검찰 소환조사 난망 (연합뉴스TV 보도화면 갈무리)

수십 년에 걸쳐 이런 한국의 현실과 밀접히 관계해 온 그다. 고비 때마다 우리의 일에 끼어든 그다. 한국 재벌의 이해관계를 위해 활동하고, 한미 통상관계에 관해 이야기했다. 대미 로비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자유무역과 한미FTA을 전도했다. 조중동 등 보수매체들이 경청한 최고 전문가 중 하나였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는 그런 그에 관한 기사들이 풍성하다. 인터넷에는 그가 뱉은 말들이 잔뜩 남아있다. 김석한은 이런 역사적 행적의 인물이다.

그가 2018년 현실로 다시 소환되었다. MB의 연루가 의심되는, 삼성 관련 의혹이 제기되는 다스 문제와 관계해서다. MB측이 ‘사기’ 낙인을 찍었고, <동아>의 종편채널인 <채널A>가 그 주장을 ‘단독’으로 옮겼다. 문제적 인물은 역사에 이렇듯 반복 출연할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그를 통해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가 2013년 “나라 위해” 했다는 일 한 가지에 관해 살펴볼 테다. 잘 아는, 윤창중 무료변론 이야기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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